교육과 진리 1 ㅣ 진리 속 개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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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지막 챕터, '교육과 진리'를 시작합니다.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우리는 교육이 어떻게 진리탐색에 공헌하고, 또 진리가 교육의 기반이 되는지 알아볼 것입니다.
체험범위 내에서의 세계규정
교육이 인식론적인 공헌, 즉 진리탐구에 공헌할 수 있는 것은 교육이 가진 고유한 특성 때문입니다. 교육은 지금까지의 인식론이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거나 가정하고 넘어갔던 사항들을 새삼스럽게 끄집어내어 재검토하거나 추가시킬 수 있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특징을 우리의 논의에서 인식론의 일부로 살려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교육적 인식론은 인식에 있어서 어떤 예외적이고 중립적인 개인과 입장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입장이건 그것은 그를 대상으로 한 교육의 결과인 것입니다. 어떤 예외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교육이 여타의 사람들이 수행해야 하는 교육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외계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우리의 내면적 상태와 수준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교육적 인식론은 오직 개별적인 인식주체의 적극적인 참여를 포함시켜서만 인식의 문제를 다룹니다. 인식의 문제에 있어서 그 누구도 방관자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방관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면 그에게 있어서 교육은 따로 존재할 이유를 잃게 됩니다. 수도계의 하나로서 학문의 세계가 있음을 확인하는 것도, 그것이 발전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도, 그리고 특정한 지식의 우열을 판가름하는 것도 교육은 그것이 우리 각자의 체험범위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것이 진실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어야 할 사항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서 개개인에게서 재확인되어야 할 사항에 속합니다.
교육적 인식론은 인식주체와 무관하게 규정되는 지식의 가능성을 거부합니다. 지식은 객관적인 실재의 그림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을 조직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객관적인 실재와 우리의 경험간의 일대일의 관계를 따져서 이론의 타당성을 검증하겠다는 생각, 즉 우리 자신의 개입 없이 지식의 타당성을 입증하려는 희망은 잘못된 것입니다. 흔히 관찰이 객관성을 보장해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의 객관성은 관찰이 주체가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는 모순된 환상에 불과합니다. 관찰은 어떤 주관 속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중성적, 예외적, 특혜적, 절대적 신념이나 관찰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마치 그런 것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는 다분히 자기 기만적입니다. 이 세상에는 모두 얼마만큼의 오류를 가진 유한한 개인들의 생각들이나 관찰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 주관성을 배제하고 객관성에 호소하는 것은 인식주체로서의 우리 각자가 맡아야 할 책임을 배제하고 회피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객관적 지식에 대한 확신의 보류
철학에서 논의되는 인식론은 흔히 공적 진술이 지식의 객관성을 보장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왔습니다. 많은 저서와 논문들이 객체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저서 속의 문장에서 그 내용을 진술하는 저자와 그것을 이해할 독자의 특수성을 배제하는 형식을 규칙으로 내세움으로써 인간의 주관적인 요인을 삭제하려는 시도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많은 저서나 논문이 익명의 형식을 즐겨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외관의 형식에 매달려서 학문의 객관성을 추구하는 것은 정직하고 성실한 태도라고 볼 수 없습니다. 만약 그 외관의 형태가 그것이 근거하고 있는 주체의 내적 체험을 상당부분 은폐하는 방식으로 표현된다면 우리는 누구의 것이 가짜이고 누구의 것이 진짜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모든 텍스트의 진술은 근원적으로 소급하면 그 저자의 주관을 포함합니다. 우리는 저자의 진술이 아니라 그 진술을 한 주관적 의미를 추적해야 합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는 학자들의 지식이 반영된 많은 텍스트들이 있습니다. 그 작품에는 저자의 지식이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그 저자는 그 지식과 더불어 가슴이 두근거리는 흥분된 삶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대하는 사람이나 독자가 곧바로 그런 지식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표명된 지식의 경우도 그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무한히 개방되어 있습니다. 독자들은 그들의 지식에 비추어 작품의 의미나 가치를 여과하고 해석합니다. 독자가 해석한 텍스트의 의미가 원저자가 의도했던 것과 다르다고 해서 결코 그것이 무의미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개별적인 세계규정은 이처럼 세계나 텍스트에 대한 독자 나름의 개별적인 해석들간의 차이를 포용합니다.
우리가 학문의 세계에 참여하는 근본 취지는 그 수도계를 나의 것으로 점유하는 방식으로 체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점에서 수도계의 가치는 객관적으로 표명될 수 없고 또한 그렇게 규정되어서도 안 됩니다. 가끔 지식은 생산자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피동형의 형태로 진술됩니다. 서점이나 도서관의 서가에서 접하는 무수한 저서들 속에는 예컨대, "X의 사실이 밝혀졌다"거나 혹은 "X의 사실이 확실하게 증명되었다"라는 진술들이 있습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이러이러한 상황에서 '유레카!'라는 탄성을 지르고 흥분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치 X의 사실이 이미 객관성을 확보한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것을 밝힌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모호성이 은폐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수준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사실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 누구에게 확실한 것으로 밝혀졌는지 하는 문제는 아직도 검증되어야 할 사항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 것을 방관하고 그냥 넘어가는 것은 학문의 세계를 단순히 그림의 떡처럼 방관하는 태도입니다. 남이 잔치를 벌이는 것과 내가 그 잔치의 음식을 먹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개별적 주체의 해석
우리가 어떤 대상 X에 대해서 발언한다고 할 때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X에 대한 발언이 아니고 X에 대한 우리 지식의 인식적 체험을 발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서 속에서 새로운 것으로 밝혀진 대상은 그에 대한 저자의 체험수준을 주체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는 그 나름의 해석을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객관적 지식에 대한 이해라고 말하는 것은 사태를 크게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독자가 그 내용에 대해서 공감하지 못하고 단지 남의 이야기처럼 읽고 있다면 그 지식의 진리성은 아직 저자에게만 국한된 것입니다. 아무리 참된 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진의를 이해할 역량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참된 것이 아님니다. 이 경우 저자는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독자에게 충분히 입증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독자에게 다시 참된 것으로 입증되어야 할 과제를 아직도 남기고 있습니다.
객관화된 지식은 언제나 그것을 읽는 타자의 해석의 범위에 머뭅니다. 저자는 자신에게 확실한 것으로 밝혀진 것이 독자인 타인에게도 밝혀질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독자는 저자가 말하는 지식을 무조건 수락하기보다는 그것이 나에게도 입증될 수 있는지를 재시험해야 합니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 지식을 평가할 수 있는 외적인 근거는 희박합니다. 외적인 근거와 단서가 개인에게 제시된다고 하더라도 외적인 평가에 대한 개인의 해석은 적어도 해석의 준거가 동등할 때로 국한됩니다. 예컨대, 더 나은 지식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아무나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자격과 자질을 갖춘 사람에게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높은 수준의 지식을 입증하고 입증받기를 원하는 저자가 있다면 그는 독자의 변화를 유도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을 자신의 책임 하에 검증하고자 하는 독자는 스스로 바람직한 변화를 모색하는 가운데 그것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교육의 원천적인 요청사항입니다.
각자가 보편성의 규정에 참여
흔히 인식론에서 모든 사회구성원 혹은 어떤 특정한 학문공동체가 서로 합의할 수 있는 공통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을 쉽게 취합니다. 예컨대, 칸트는 선험적 범주를 가정하였습니다. 그것을 문제시한 초기의 해석학은 그 선험성의 제약에서 벗어났다고 하지만 역시 개인간의 차이를 인정하기보다는 문화의 공동체적인 체험을 전제하였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지식의 보편성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육은 본질상 서로 인식수준의 차이가 있는 개체들간에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이기 때문에 그런 전제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어떤 지식이건 보편성에 이를 가능성이 있지만 그 가능성은 우리들 개별적인 개인의 관여에 의해서 확인되어야 합니다. 교육은 인간의 보편성을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을 실현하고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만을 전제합니다. 교육은 보편성을 가정하기 전에 개별적인 사람이 점유한 지식을 중시하면서 역으로 그것들이 하나의 보편성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순서를 취합니다. 이런 내규에 의해서 어떤 지식이 갖는 보편성의 검증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지식을 언제나 자신의 입장에서 새로이 획득해야만 합니다.
대개 진리는 학문의 세계에 속한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이 결정하고 판단할 위임사항으로 봅니다. 그러나 교육은 이것 역시 용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약 우리의 지식을 타인이나 학자라는 특수한 집단이나 전문가에게 위임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우리는 애초부터 교육이라는 별도의 과정을 생각할 필요조차 없으며, 소수의 교육이 다수의 교육을 대신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개인에게 있어서 지식은 자신의 노력을 통해 그것을 사유화함으로써 비로소 그것에 대한 실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식은 소유주체의 자각을 떠나서 타인이 대표하여 규정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교육에서 우리가 의도하는 것은 타인의 지혜에 의존하기보다는 그것을 감식할 수 있는 자신의 판단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교육에서의 진리는 타인에 의해서 규정되고 모방하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그것을 체험하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