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산업혁명으로 본 한국의 교육문제
3D프린팅, AI, 나노기술 등 현실과 가상을 연결하는 시스템으로의 전환, 4차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전세계에 걸쳐 새로운 혁명이 대두됨에 따라, 국내 또한 2018년부터 코딩교육이 의무적으로 이루어질 예정이다. 그러나 문제는 학교의 코딩의무교육화에 앞서 교육시장 그리고 유치원, 초등학생 자녀로 둔 부모들이 더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코딩의무교육화 소식에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가 뒤쳐질 새라, 얼마 없는 코딩학원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이들은 지금까지 와 같이 간신히 4차산업혁명에 적응해 낼 뿐, 시대의 앞을 예측하고 앞서 나가진 못할 것이다. 현재 한국의 학생들에게 코딩교육을 비롯한 모든 교육은, ‘나를 위한 공부’라는 생각 보다 당장의 ‘경쟁해야 할 과목’이 하나 더 늘어난다고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즉, 경쟁에서 다른 사람을 이겨야 한다는 마음에, 배운 것을 나중에 어떻게 이용할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미래를 내다보고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수천명의 대충 아는 자와 수십명의 암기왕을 배출 해내는 것이 한국의 이러한 교육문제가 빚어낼 결과이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은 ‘암기식’ 교육으로 적응해 낼 수 있었던 지금까지 와 달리 개혁적이고 또 능동적인 교육을 요구함에 따라, 경쟁의 원인을 찾고 우리나라 학생들을 경쟁 구도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시급해 보인다.
“교육의 경쟁구도”. 현 교육의 경쟁구도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사실 ‘경쟁’이라는 단어는 희소 자원을 분배하는 경제 부문에서 주로 다루는 개념이기에, 우리나라 교육의 주요 특징 중 하나가 경쟁이라는 점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1960년 대 이후, 제조업 중심의 빠른 경제 성장을 위해 교육제도를 이용함으로써 교육의 참된 의미는 퇴색되어 왔다. 즉 교육제도는 교육 자체의 의미를 모색하기 보다, 경제 성장을 위한 획일화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고려된 것이다.
과연 선진국과 우리나라의 발전 차이는 ‘교육제도’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그리고 한국의 교육제도가 타국가에 비해 크게 뒤쳐져 있을까. 우리나라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거시적인 제도의 변화 보다, 개인들의 ‘교육의식’을 먼저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필자가 미국에 있을 때 느낀 교육의 전반적인 차이는 ‘제도’와 같은 큰 부분이 아니었다. 필자를 향해 묻는 ‘그 선택은 너를 위한 거니?’ 라는 질문이었다. 나를 위해 공부한다는 뚜렷한 의식이 본인을 포함한 모두가 발전하는 방향으로 교육 목표와 제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미국 뿐만이 아닌, 뉴질랜드의 경우도 함께 같이 잘되고 싶다는 의식을 가지고 교육단체끼리 경쟁하기 보다는 협력하여 제도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많은 국가들이 저마다의 교육의식을 토대로 그들만의 교육제도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잘하려는 것' 이 한국만의 교육의식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한국의 교육이 경쟁적으로 변질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또한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남'을 의식해온 기간보다도 더 오랜 기간동안 '나를 위한' 공부를 해왔던 것이다. 그 근거로 조선시대를 지배했던 유학의 근본인 ‘논어’에는 이러한 말이 적혀 있다.
“옛날 배우는 자들은 자신을 위하였는데, 지금에 배우는 자들은 남을 위하여 한다.”
(古之學者는 爲己러니 今之學者는 爲人이로다)
조선시대의 배우는 자들은 '나를 위한 공부(爲己之學)'라는 교육의식을 바탕으로 학문에 열중했으며, 과거제로 인한 경쟁구도로 교육의 본질이 흐려질 때면 바로잡곤 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 학문의 목적-‘나 자신’을 위해야 하는 것인지(爲己之學) 혹은 타인을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쓰여야 하는지(爲人之學)-에 대해서는 두 논쟁이 있었다. 그럼에도, 학문의 방향성을 정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으며, 선택에 선행되는 것은 본인이 세운 교육 의식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한다. 아무리 좋은 교육제도를 타국가에서 가져 온다고 한들 교육의식이 뚜렷하지 못하다면, 그 제도는 이전의 제도와 같이 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교육제도를 바꾸기에 앞서, 개인이 교육의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한 한국은 ‘교육문화지체’ 상황에 놓일 것이다.
사실, 교육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교육실체’로서 반영하는 일이란 쉽지 않다. 교육의식을 교육실체로 전환하는 과정은, 교육의식을 가진 다수의 개인이 모여야 하기 때문이다. 교육자로서 필자 또한, 필자의 교육의식을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권유한 바 없다. 학생들에게 조언을 했다 가는 학부모로부터 ‘당신이 우리 아이 인생을 책임질 건가요?’라는 질타를 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고착화되어가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쟁구도를 개선하기 위해선, 교육의식을 찾고 추구하는 ‘개인의 용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무책임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지금의 교육현실과 참 멀어 보이는 말 같음에도, 이미 우리나라는 교육적으로 터닝포인트가 될 시기를 맞이하고 있는 듯하다. “이게 왜 내 인생에서 중요해?” 라는 말을 수시로 던지는 아이들을 보고 우리는 ‘중2병’에 걸렸다고 말한다. 아이들의 이러한 반항에 부모들은 공부가 하기 싫어 다른 소리를 한다고 치부한다. 그러나 이는 현재 받고 있는 교육에 있어 혼란을 느끼고, 회의감을 느끼며 교육의식을 정의하려는 시기라고 말할 수 도 있다. 교육의식을 정의하려는 아이들 가까이 그러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을 형성한다면, 교육의식을 가진 다수가 생기는 것은 그다지 먼 미래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