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 상호 깨달음 8 ㅣ 가르침과 깨달음
*본 기사는 "교육의 재정의" 시리즈의 21번째 컨텐츠입니다. <클릭>해서 처음부터 보시는 것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다음 컨텐츠 (교육과 진리 1 ㅣ 진리 속 개별성)
*어려운 단어가 있나요? 용어사전을 활용해보세요.
우리는 지난 7개의 영상을 통해 배우고 가르치는 과정을 공부해왔습니다. 오늘은 그 여정의 종결을 찍는, 가르침과 깨달음간의 관계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합의과정의 존중
합의는 타증의 한 조건입니다. 선진과 후진의 인식적 합의와 선/후진의 우열에 대한 정당화는 후진이 선진의 수준에 도달했을 때에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합의는 결코 타증의 충분조건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타증은 가치의 정당화에 속하는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후진의 품위를 우리의 품위에 일치시키는 방법은 조건화, 교조화, 최면, 세뇌, 폭력, 강요 등 다양합니다. 한편 그 모두가 가치의 정당화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때문에 타증에서 중요한 것은 합의가 아니라 합의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하화하는 것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가치실현과 가치공유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선진에 대한 후진의 동조는 세속계적인 권력, 지위, 부, 위세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후진이 강요와 공포, 혹은 외재적 보상에 따라 선진의 품위에 동조한 것이라면 그것은 수도계의 내재적 가치 추구라는 명분에 손상을 입힙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자기 자신의 품위상의 우세를 타인을 통해서 평가받으려는 타증의 취지와 의도에도 어긋납니다.
타증의 중요한 준칙은 강요하지 않는 대신 우정어린 설복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수도계에서 상대에게 특정한 품위를 강제로 주입하고 그것을 판단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교육의 세계에서 이탈하는 것입니다. 하화자의 타증은 상대의 자발적인 복종을 유도하는 것입니다. 후진은 많은 경우 자신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선진이라는 우리의 눈을 통해서 봅니다. 이 때문에 하화자인 우리는 유관한 구체적인 상황의 맥락에서 잘했다거나 잘못했다는 식의 즉각적인 반응을 반사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평가는 종국적으로 제자에 의해서 수용될 단계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는 우리의 하화에 의해서 높은 지식을 습득해야 하고 그 습득을 통해서 우리의 지식이 갖는 상대적 우위를 자발적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타증은 그의 자증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제 지식에 대한 우리의 평가와 그의 평가가 일치를 이룬 것입니다. 만약 그런 자증의 단서가 제자 편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타증은 아직 완료된 것이 아닙니다.
교육적인 증명은 언제나 유보적인 것입니다. 여기서의 증명은 어떤 주장에서 출발하여 장기간에 걸쳐서 유보적으로 그에 대한 진실성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수도계에서 절대적이고 궁극적 원천이 될 수 있는 품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하화자인 우리의 품위가 포함됩니다. 우리에게 궁극적인 것으로 보이는 품위도 결국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그에 접근하는 하나의 단계에 불과합니다. 이 때문에 스승인 우리의 품위를 제자에게 일치시킨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자가 우리의 선진적인 품위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데에는 그 일치가 불가결합니다. 이 때문에 스승인 우리가 제자에게 자신의 품위를 인정받는 타증의 기간은 나와 그간의 품위의 차이가 많을수록 길어집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닭이 알을 품는 시간 혹은 농민이 결실을 기다리는 시간과 같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심열성복의 유도
하화의 과정에서 시종 유의해야 할 점은 상대가 그것을 강요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화에 의한 타증에서는 품위의 상대적인 우위를 증명하려는 것 뿐 어떤 강압적인 지배나 품위의 신성함을 입증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반성적이고 맹목적인 추종자를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또한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나는 맹신자 역시 우리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는 결코 가치의 공조적 타당화에 참여할 협조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가 협조자가 되는 길은 자발성을 가지고 그 자신이 성취한 것을 토대로 우리의 지식을 정당하게 자주적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제자는 항상 제자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제자를 한군데 붙잡아 두는 것은 더나은 인간성을 확인해 나간다는 교육적 공조의 원칙에 어긋납니다. 하화자인 우리는 어떠한 경우라도 제자의 자유로운 상구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자는 언제라도 하화자인 우리의 품위를 넘어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스승이 제자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내린 결정을 제자가 무조건 수용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스스로 책임 있게 결정할 수 있는 자질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 자질을 근거로 지식의 우열에 대한 상대의 판단을 심열성복적으로 유도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제자에게 자신을 경계하라고 경고하는 하화자는 진정으로 대가다운 점이 있습니다.
겹제자의 확보
하화에 의해서 타인에게 타증된 품위는 마치 유전자에 의해서 우리의 생물적 형질이 전달되듯이 우리의 제자에게 전달됩니다. 한 개인의 삶은 영속될 수 없지만 그의 생물적 형질은 그의 자손에 의해서 유지됩니다. 마찬가지로 한 개인이 개척한 품위는 영속될 수 없지만 그것은 하화에 의해서 다음 세대로 계승될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한 개인의 일생을 넘어서서 사후에도 상당한 정도로 미래에 영향을 주면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제자는 엄밀하게 말해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의 부류는 우리에게 배운 것을 자신의 일대에서 종결시키는 제자 즉 홑제자이고, 다른 하나의 부류는 그 자신이 배운 것을 다시 그의 제자에게 계승하는 겹제자입니다. 후자는 제자 속에 또 제자가 있는 셈이기 때문에 우리의 품위는 그들을 통해서 계승되고 발전될 수 있게 됩니다. 이미 사멸한 역사적인 인물들의 품위를 지금까지 우리가 접속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들의 겹제자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 명의 겹제자가 다시 열 명의 겹제자를 확보했다고 할 때 그 겹제자의 수는 100명으로 증가됩니다. 이는 수도계적으로 볼 때 엄청난 저변확대의 효과를 가져옵니다.
이렇게 중요한 겹제자의 체계적인 양성은 우리 자신의 '하화의 하화'를 통해서 가능하게 됩니다. 우리는 특정한 품위를 제자에게 하화할 뿐만 아니라 하화하는 것을 하화함으로써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하화를 잘 할수록 우리의 제자는 그것을 모범 삼아 자신도 그의 제자에게 똑같은 하화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타인의 일생을 통해서 우리의 하화를 대대로 연장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자에게도 상구를 통한 자증뿐만 아니라 하화를 통한 타증까지를 허용한다는 점에서 교육적 인식론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다음 컨텐츠 (교육과 진리 1 ㅣ 진리 속 개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