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교육과 상호 깨달음 6 ㅣ 가르침의 전개 1

*본 기사는 "교육의 재정의" 시리즈의 19번째 컨텐츠입니다. <클릭>해서 처음부터 보시는 것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어려운 단어가 있나요? 용어사전을 활용해보세요.

 

지난시간에 우리는 후진이 선진인 우리 자신을 인정하기 전에 우리의 역량을 시험할 기회를 충분히 갖는 것이 모든 면에서 안전하다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시험할 기회를 주어야할까요?

차상품적 매력의 확보

우리는 제자의 현품을 존중하면서 그들이 다음 단계에서 발달할 가능성에 여러모로 응답해야 합니다. 선진으로서 우리는 통상 지금의 자신에 비추어 후진의 상황을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후진을 존우하는 하화자는 그런 태도를 버립니다. 누차 강조되었지만 우리에게는 후진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후진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후진의 답은 선진이 보기에 오답이지만 후진에게는 최선의 정답입니다. 자신의 현품은 수준의 고하를 막론하고 자존의 핵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애착과 자존심은 품위의 수준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후진의 자존심을 손상시킬수록 그에 대한 우리의 청학은 성공으로부터 멀어질 것입니다.

선진으로서 우리는 후진이 가진 품위를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자신과 후진이 보고 느끼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선취적으로 알고 있는 유리한 입장에 있습니다. 우리는 후진이 오류 속에 갇혀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갇혀 있는 상태에 있는 후진은 자신의 오류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한편으로 후진에게 그 오류를 지적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대체할 현실적인 품위를 시사하는 양면의 전략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런 양태로 우리를 드러낼 때 우리는 그에게서 상구를 논할 때 지적했던 차상품적 매력을 차츰 얻게 되며, 그 차상품적 현묘함, 미묘함, 불가사의, 기괴함, 모순, 수수께끼가 동경, 희망, 호기심, 관심, 흥미를 유발시켜 우리의 청학에 제자로서 응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제자의 상구 돕기

후진이 제자됨을 수락했을 때 선진으로서 스승이 할 과제는 분명해 집니다. 스승으로서 우리는 제자가 과거 어느 시점에서 내가 극복해야만 했던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결함을 비난하기 전에 그가 경험하고 있는 고통, 공포, 실패를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계기와 경험이 무엇이었는지를 회상하면서 우리 자신이 제자를 위해 도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상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지금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 밟아온 상구의 도정을 제자가 그의 위치에서 다시 밟도록 격려하고 돕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물론 많은 활동과 단계와 시간이 필요했었다는 사실이 일차적으로 고려되어야 합니다. 제자가 단번에 자신의 품위에 오르기를 기대하기보다는 그가 위치한 현품에서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필요한 단계를 거쳐서 우리 자신의 품위 쪽으로 진전할 수 있는 방식의 해결을 구해야 합니다.

제자의 현품은 어느 시점에서 스승이 지났던 과품에 해당합니다. 제자가 단번에 우리의 품위에 도달할 방법은 없기 때문에 도움의 출발점 역시 제자의 현품이 되어야 합니다. 하화자로서 우리는 우선 제자의 현품의 위치를 여러모로 파악하고 거기까지 하강해서 그로부터 제자의 상구를 돕는 일을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우리가 제자의 상구를 돕는다고 할 때 그것은 강요나 간섭이 아니라 도움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도움의 활동은 상대가 당면한 필요와 그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위치하고 있는 품위의 권위와 정당성을 상당기간 유보하고 제자가 그의 위치에서부터 상구를 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요구하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그런 도움의 요구와 그에 대한 응함의 상호작용이 활발하게 진행될 때 제자는 그가 가진 품위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의 내적인 품위의 요소를 확장하면서 다음 단계의 품위를 획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서 그동안 유보되었던 우리 품위의 정당성이 점차 제자에 의해서 승복해야 할 권위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됩니다.

선행문제 요구의 금기

하화자가 흔히 빠지는 오류의 한 형태는 선결문제 요구입니다. 이는 하화를 진행하는 동안 후진이 아직 요망하는 품위에 이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화자가 마치 그것을 이미 획득한 것처럼 전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논의한 고압제는 바로 그런 오류의 전형적인 유형에 속합니다. 하화자는 후진에게 그의 품위에 맞는 사고유형, 행위, 소망, 흥미, 계획, 표준, 이상, 생활양식을 투사하며 거기에 일치하기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후진에게는 그런 주장이 낯설고 새로운 것이며 그의 품위에 충격을 주기 때문에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더 나아가 극단의 경우 의심, 증오, 복수, 적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고압제의 흔한 형태의 하나가 언어를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품위를 상대에게 직접 소통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품위의 내용을 언어로 표현하고 제자가 그것을 곧바로 이해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품차가 있는 후진에게 우리의 품위를 직접 전달하려는 것은 무모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 전달을 곡해함이 없이 그대로 받아들일 체험의 공감대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후진은 하화자의 말이 아무리 그럴듯한 의미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품위에 맞게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하화자의 고압제에 대한 상구자의 저압제의 한 형태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압제에 대한 제자의 다른 방식은 지득, 즉 우리가 수용하기를 요구하는 품위의 외양만을 단순히 흉내내는 것입니다.

선진인 우리의 품위에 비추어 볼 때, 제자는 언제나 미흡해 보이거나 잘못을 범합니다. 제자는 잘못을 범하고도 그것을 모릅니다. 몇 번이나 좋은 말로 타일렀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습관과 실수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그 잘못을 오직 그의 책임으로 돌린다면 그것은 오히려 스승인 우리의 잘못입니다. 그 부족함이 제자에게 없다면 애초부터 스승의 도움이 필요할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아직 획득하지 않은 품위를 하화의 상황에서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부당합니다. 따라서 스승으로서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제자로 하여금 부족한 경험을 보충하도록 촉구하고 돕는 것입니다. 첫 출발은 제자인 상대가 아직 모르고 있고 잘못 이해하고 있고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 다음에 제자가 그런 곤경에서 빠져 나옴에 있어서 내가 수행해야 할 도움의 형태가 어떤 것이어야 할지를 한번 더 고려하는 것입니다.

하화적 이해

후진을 우리의 논리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무모합니다. 품차가 크면 클수록 우리와 제자의 직접적인 현품의 접촉은 더욱 어렵게 됩니다. 또한 그의 이해를 기대하는 것이 무망한 일이 됩니다. 선진인 우리와 후진은 품위상 서로 다른 수준에 있으며 그만큼 체험구조상의 균열이 있습니다. 후진은 동일한 사물에 대해서 우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이 때문에 제자의 사고는 우리의 논리로서는 그대로 용납하거나 수용될 수 없습니다. 그런 양편의 입장에서 스승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화적 이해'입니다. 이것은 하화자가 자신을 기준으로 제자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고 제자의 수준으로 내려갈 만큼 충분히 품계를 하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품위상의 차이에 따른 논리적인 간극을 뛰어넘어 과거의 어리석고 어두운 소굴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화자는 지금 처한 자신의 품위에서 직접 제자의 품위를 이해할 수 없고, 후진은 지금 처한 자신의 품위에서 직접 스승의 품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타협할 수 있는 가능성과 책임은 스승인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제자가 그들의 성장이라는 과업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문제의 제반국면들에 적응해야 합니다. 교육의 소재인 수도계와 관련하여 우리가 제자와 직접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은 정확히 제자의 현품 이하에 한정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과거로 돌아가서 지금 제자가 처한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제자의 인식구조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들의 언어로 상대와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자신이 생각하는 현품에 비추어 볼 때, 분명한 오류에 속하는 것과의 타협을 수락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문제사태의 유발

하화적 이해는 후진의 공감을 얻기 위한 것이며 그의 현품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것입니다.제자가 처한 현재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먼저 그의 현품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자의 현품을 일축하기 위해 당분간 공유해야 하는 환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제자의 품위를 향상시키려는 우리의 입장에서 제자의 현품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그것의 해체를 촉구하는 방편으로써만 정당화됩니다. 선진인 우리에게는 정답이 될 수 없는 것을 당분간 정답으로 간주하고 후진의 낮은 차원에 잠정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되 그 정당성을 오랫 동안 허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너무 오랫 동안 지속된다면 제자는 그의 소박한 신념과 품위에 안주한채 겨우 시작에 불과한 단계를 완전한 것으로 착각할 것입니다. 하화적 이해의 효력은 어디까지나 잠정적 특성을 벗어나서는 안 되며, 그 시한성은 우리의 도움이 이루어지는 경과의 흐름과 더불어 제자에게 점차 드러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제자는 현품이 제공하는 안전한 세계구성에 안주하려고 하지만 그 곳은 사실상 안전한 장소가 아닙니다. 우리는 제자에게 이제 그의 현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상황을 제공하고 그것의 불안정함과 불확실함을 깨닫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들의 현품 밖에는 항상 무수한 불확실성, 모험, 시련, 위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제자가 자발적으로 응했을 경우에만 실효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화자의 문제와 도전은 결코 제자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제자는 하화자가 이미 해결한 것을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제자가 그의 위치에 알맞은 호기심과 도전감을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문제에 있어서도 너무 갑작스럽지 않는 일정한 완충지대를 설정해 주어야 합니다.

제자의 자발적 에너지의 활용

하화의 비결은 하화자 자신의 공력을 일방적으로 구사하기보다는 상대인 상구자의 에너지를 역이용하는 데 있습니다. 하화란 기본적으로 스승이 자신의 품위를 상대에게 부과시키거나 전달하는 것이 아니고 제자 스스로가 현재의 품위를 재건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화자에게 아무리 흥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제자가 곧바로 그것에 대해서 흥미를 갖도록 요구하는 것은 무모합니다. 그런 조처는 제자의 능동적인 참여를 억제시킵니다. 하화자가 자신에게 흥미 있는 것을 제자에게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제자에게 곧바로 흥미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흥미의 일치점은 상당한 수련을 거친 후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바로 교육의 과정인 것입니다.

제자에게 선택의 기회와 그가 선택한 과제에 전적으로 몰입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야 제자편으로부터 내재적 동기화의 가치가 충분히 실현됩니다. 따라서 교육적인 교섭은 스승의 흥미에서가 아니라 제자의 흥미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상구의 촉진자로서 우리가 흥미를 가져야 할 것은 특정 소재의 품위가 아니라 상구를 하는 제자의 흥미를 돋구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처럼 상구의 템포와 하화의 템포는 서로 엄격하게 구분됩니다. 하화자인 우리에게 전자는 권태로움의 근거임에 비해서 후자는 그 자체가 하나의 도전의 의미를 갖습니다. 즉, 제자가 상구의 흥미를 계속 유지하도록 자신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은 하화에서 해결해야 할 가장 고유하고 도전적인 과제입니다.

RSS Feed
교육판 추천 컨텐츠 
최신 교육목록 컨텐츠  
최신 이건어때? 컨텐츠 
최신 교육성찰 컨텐츠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