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 상호 깨달음 5 ㅣ 가르침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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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교육적 관계에 있어서 배우는 사람 입장에서 공부해보았다면, 가르치는 사람 입장에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후진을 통한 품위상의 상대적 우위의 검증
우리가 얼마만큼의 상구에 성공했다면 우리에게는 그만큼의 후진들이 늘어나는 셈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과거 우리의 어리석었던 상태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방조해서 넘어갈 사항이 아닙니다. 그들이 저급의 삶을 영위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과 결코 무관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넓은 의미의 나일 수도 있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품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보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으로서, 물질과는 달리 나누어 줄수록 불어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렵게 개척한 지식의 심연이 타인에게 공유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아름다운 인간적인 유대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이제까지 지도를 받은 스승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질적인 보답이기도 합니다. 그런 중요한 인간적 과업은 우리가 바로 하화의 내재율에 충실히 복종함으로써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화는 또 다른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식론적인 것으로서,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체험한 우월적인 지위의 내용이 후진에게도 공감될 수 있는가를 검증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 자신의 진리를 세울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진리를 세우는 일도 중요한 과제의 하나입니다. 우리의 품위 혹은 우리의 지식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알거나 혹은 내가 혹시 범할 수 있는 착각이나 오류를 알기 위해서는 타인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지고한 수준의 품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다수의 동료인간과 후진들에게 공유되거나 공감을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 가치의 보편성은 아직 충분히 입증된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단순히 나의 것에 그치지 않고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닐 것이 요망됩니다. 객관적 절차를 부인하는 교육적 인식론이 그 보편성을 확인하는 길은 내가 가진 지식에 대한 타자의 상호주관성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상구를 통해서 선진의 품위가 갖는 상대적인 우위를 인정하는 경로를 밟는 길이 있음을 밝혔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품위가 열등한 것이었음이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하화에 의한 타증은 그 경로를 역전시켜 후진에 대해서 나의 선진적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것입니다. 선진이 될수록 우리는 후진들과 다른 세계 속에 들어가서 그들로부터 격리됩니다. 따라서 이제 상구를 통한 자증의 경로에서 스승이 취했던 역할을 우리가 수행해야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후진들은 대개 우리의 품위상의 상대적인 우위나 그들의 어리석음을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들은 이를 감식할만한 안목과 자격을 아직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후진들의 품위 향상을 돕고 그들에게서 우리의 품위가 갖는 상대적인 우위를 인정받아야 합니다.
타증의 두 가지 측면
상구를 통해서 높은 품위를 얻는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습득하지 못한 후진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킵니다. 이 때문에 자신이 상구를 통해서 얻어낸 창조적 작업과 우월적 지위에 대한 후진의 이해나 승인이 없다면, 그 지위가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 그 실효를 거둘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한 개인의 나태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도계 전체의 연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식론적인 과제는 후진이 그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고 선진인 우리의 품위가 옳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도록 하는 절차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 중 가장 분명한 방법은 후진에게 우리가 후진의 상태에서 지금의 상태에 이르는 데 취한 경과를 그들도 경험할 수 있도록 촉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육에서 하화에 의한 타증에 해당합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타증에는 서로 혼돈해서는 안 될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후진이 지금의 수준을 극복하고 발전하도록 향도하는 것입니다. 누차 강조했듯이 완전한 의미의 진리는 체험할 수 없습니다. 다만 상대적인 위치가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얻고자 하는 판단은 우리가 상구를 통해서 성취한 품위가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상대적으로 후진들의 것보다는 높은 수준의 것임을 그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입니다. 선진으로서 우리가 체험한 진리는 후진들도 경험할 수 있으며, 이런 방식에 의해서 그들의 공감을 얻을 때 우리의 선진성에 대한 정당화는 더욱 확고해질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타증은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후진이 우리가 가진 동일한 품위에까지 도달하도록 함으로써 우리가 가진 품위의 실재성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선진과 후진이 서로 큰 품위의 차이가 있다고 할 때, 그들이 동일한 품위에서 상호주관성을 획득할 수 있는 기간은 길어집니다. 이 때문에 첫 번째의 것에 비해서 두 번째 의미의 타증은 더 많은 하화의 공력과 기간을 요구합니다.
후진 찾기
상구를 통해서 외재하는 높은 품위를 올바르게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고 도전적인 일이듯이, 하화를 통해서 우리가 확보한 높은 품위를 남에게 올바르게 인식시키는 것 역시 많은 어려움과 응분의 기술을 요구합니다. 상구에서는 하품과 상품의 대비가 모두 상구자라는 한 개인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간의 교체는 자연스럽고도 분명한 것이었습니다.그러나 서로 다른 개체인 선진과 후진의 경우 판단주체가 서로 다른 상황이기 때문에 상대적 대비가 그렇게 분명한 것이 아닙니다. 개인 내적으로 본다면 한 개인에게 있어서 후진의 선진에 대한 대비는 전방대비에 상응하고, 반대로 선진의 후진에 대한 대비는 후방대비에 상응합니다. 그러나 이는 서로가 내면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투시했을 때에나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서 개인간에 있어서는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려운 조건입니다.
타증은 우선 후진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후진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을 어떻게 타증의 대상으로 삼을까요? 여기서 분명한 사실의 하나는 후진은 우리가 이미 어리석거나 그릇된 것으로 지양하고 탈피한 품위를 아직도 옳은 것인 양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우리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경험부족의 많은 징후들을 보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해결한 문제를 그들은 해결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디딤돌로 사용했던 것이 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사태에 대한 그들의 평가기준은 우리의 것에 비해 저급합니다. 그러나 그런 제반 단서를 토대로 상대에게 금방 후진임을 인정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오류로 보는 자신들의 양태를 오류로 인정하지 않는 또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자신의 우월성을 금방 알아보고 시인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후진이 아닐 것입니다. 후진의 경우 그들은 아직 나의 품위를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투시할 수 없는 객체적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후진에게 곧바로 우리의 선진적 우월성을 인정받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무리입니다.
후진의 판단력 향상의 과제
엄밀하게 말해서 후진은 선진인 우리의 품위를 올바르게 식별하거나 평가할 능력이 없습니다. 자신의 현품 속에 갇힌 후진은 그들이 가진 품위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우리와의 동등함을 주장하고자 합니다. 선진인 우리가 자신의 지식이 정답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듯이 그들도 그들의 지식을 정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진 밑에 후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진에게도 다시 후진이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후진 역시 자신의 품위에 대한 상대적인 우월성을 감지하고 있으며, 그 점을 고려한다면 후진은 오답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그들 나름의 정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 정답이 대비되는 경우 선진의 이해하기 어려운 품위가 후진에게는 오히려 열등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선진이 과품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후진의 현품을 손쉽게 지배하거나 제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옳은 것에 대한 판단을 타인으로부터 얻어내려면 강요가 아닌 설득이 필요합니다. 타증에서 불가결한 것은 후진들에게 선택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후진이 내리는 평가는 그가 현재 알거나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선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평가의 기준을 자신의 수준에까지 올려놓는 것입니다. 수도계상의 품위차이를 증명하려는 교육적 인식론에는 그 타자를 있는 그대로 둘 것이 아니라 올바른 판단을 가능하게 하도록 일정한 자격을 부여하는 과정이 첨부됩니다. 타인이 알아주기를 바라거든 그들이 내 지식을 옳게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갖추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후진과 선진은 모두 자신의 현품을 기준으로 수도계의 가치평가에 가담합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현품이 곧 그들이 내놓을 수 있는 정답인 것입니다. 우리가 교육을 통해서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 정답의 상대적인 위계입니다. 후진은 더 나은 정답을 알기 이전에는 그 더 나은 정답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특별한 애로 때문에 후진에게 선진의 품위를 인정받는 올바른 순서는 후진으로 하여금 그의 동등성에 대한 주장을 자발적으로 철회할 수 있도록 그의 현품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향상가능성에 있어서 인간의 유적 공통성
인간에게 유적 공통성이 있다는 말은 한편으로 동일한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의 노력에 의해서 동일한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교육에서 강조하는 유적 공통성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있습니다. 타증은 이런 전제하에 타인들이 자신과 같은 상구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품위를 획득하도록 돕고 그 품위에 대해서 동일한 종류의 가치체험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교육에서는 개별적인 품위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 품위를 공동으로 성취하고 향유할 수 있는 공통의 기반이 문제됩니다. 그것이 교육적 인식론에서 추구하는 보편성의 이념입니다. 선진은 이런 가정 아래 자기 자신의 품위가 발전한다는 것만을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경험들이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할 수 있습니다.
선진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후진의 향상 가능성을 믿고 그것을 실현시키도록 돕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후진은 향상된 품위를 점유하고 이전의 현품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며, 우리의 지도를 받아 점유하게 된 더 나은 품위를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결국 그 과정이 반복되어 충분한 진전이 이루어졌을 때 후진은 선진의 품위에 이르는 시점에 이를 것이고 이제 선진인 우리의 품위에까지 동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서로에 의지해서 상호간에 고차적인 품위를 실현하고 확인하고 공감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이런 타증의 작업은 그 자체가 인간적인 유대를 확인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상의 평가이고, 여기에는 사실상 하화자 나름의 고독과 극복되어야 할 난점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타증의 비결은 곧 하화의 내재율을 충실히 따르는 데 있습니다.
청학
후진이라고 모두 우리의 하화에 순순히 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하화의 첫 순서는 선진인 자신을 스승의 위치로 그리고 후진을 제자의 위치로 전환시키는 사전의 약속을 상대에게서 받아내는 것입니다. 후진 스스로가 제자되기를 청원하며, 선진인 우리가 그 요청에 응한다면, 이 첫 번째 과제는 쉽게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하화는 그처럼 상대로부터 청교를 받는 방식으로 용이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실은 그런 자발적인 후진보다는 소극적이거나 혹은 선진에게 도발적인 후진을 상대로 타증해야 하는 상황이 더 많습니다. 이 때문에 선진인 우리가 자신의 판단에서 후진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접근해야 합니다. 그 적극적인 형태는 청학입니다. 그러나 청학은 상대에게 받아들여져야만 효력을 발휘합니다. 만약 선진이 처음부터 무턱대고 후진의 생각을 그릇된 것이라고 판단하면 교육적인 관계의 성립이 곤경에 처합니다.
자신의 청학에 후진이 응하게 하는 하나의 조건은 상대가 자신의 선진적 권위에 대해서 깊은 신뢰감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품위를 노출시켜 상대에게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위력을 과시함으로써 그에게 자신의 권위에 대한 복종의 태도를 유발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를 상구보다는 맹목적인 의존으로 기울게 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 위험성은 차후의 성공적인 하화활동에 의해서 해소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후진이 자신의 생각이 선진의 것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상구에 의해서 그것이 부적절하거나 그릇된 것임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절차가 후속되어야 합니다. 후진이 선진인 우리 자신을 인정하기 전에 우리의 역량을 시험할 기회를 되도록 충분히 갖는 것이 모든 면에서 안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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