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 상호 깨달음 2 ㅣ 배움의 전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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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배우는 행위가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세상을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는 사람과의 소통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배움이 진행될 때 우리가 취해야 할 마음가짐과 행동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스승에 대한 조건부의 신뢰
선진은 지금의 상구자에게 당장 이해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또한 지금의 우리의 기준에 비추어 마음대로 평가될 수도 없습니다. 선진은 우리가 한참동안 변화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수도계에서는 대개 선진의 수보다는 후진의 수가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여기서 합의와 일치라는 세속적인 기준이 적용될 때 언제나 불리한 것은 선진 쪽입니다. 이 때문에 세속적인 기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 수도계가 당면한 큰 과제의 하나로 남습니다. 후진이 선진에게 가할 수 있는 “저압제”가 존재합니다. 우리의 눈에 그의 선진성은 불합리하고 괴이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상구가 종료되기 이전에는 그와 상구자 사이에는 이질감, 모순, 갈등, 분열의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신, 증오, 적대, 냉담,무시, 격리의 감정으로 발전한다면 그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청교가 선진에게 수락되었을 경우 그때부터 우리는 그의 지도에 충실하게 응해야 합니다. 스승이 제자인 우리를 미지의 길로 안내하는 후원자가 될 수 있는 것은 그가 현재 우리의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스승의 선진성은 우리에게 언제나 신비로운 것이며, 그에게 선진의 예우를 깍듯이 갖추어 주었을 때 우리에게 그 신비가 밝혀질 기회가 옵니다. 그를 이해하려 하고 그의 지도를 청한 이상 우리는 그의 선진적 합리성이 유리하게 드러나는 방식으로 처신해야만 합니다. 선진성은 항상 후진에게 얼마만큼의 의혹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구되는 자세가 불신을 조건부적으로 연기하는 것입니다. 상구자는 하화자에게 자신의 의문을 일단 유보하고, 자신을 도울 충분한 시간을 주고, 그 시간동안 그의 권위를 수락하고, 그의 요구에 기꺼이 부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조건부적 절차와 기간에 대한 검증은 그것이 결과하는 향상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장담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그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해서 믿었던 것이 타당한 것인지를 검증할 수 있게 됩니다.
상구자로서의 자주성 확보
스승은 우리의 상구를 대행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상구의 안내자에 불과합니다.또한 그는 상구자인 우리가 모방할 대상이라기보다는 우리의 품위를 향상시키는 촉진자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상구를 하는 것은 더 나은 품위를 우리의 것으로 경험하기 위한 것입니다.세계규정에 있어서 어떤 대리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상구자는 자신의 지식이란 결국 자신에 의해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개체적 책임과 주체성을 꿋꿋하게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 기본적인 사실을 망각하고 상구자가 스승이 가진 품위를 겉으로만 모방하려고 하면 그것은 그의 것으로 동화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조련의 기술이 없이 사자의 소굴에 들어가는 것처럼 위험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또한 스승의 권위에 대한 신뢰는 상구가 진행되는 동안 점차 상구자에게 증명되어야 합니다. 충분한 정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등의 상승과 상구의 보람을 보장하지 않는 스승은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상대적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역할은 서로 다릅니다. 그 다름이 곧 그들간의 결속을 보장합니다. 스승이 우리에게 일면적인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제자의 몫을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인 우리가 스승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만큼 우리가 스승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스승의 지도는 지속될 수도 중단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는 우리의 반응에 따라 지도를 재조정할 수도 있습니다.따라서 우리는 제자로서 우리에게 허용된 요구와 활동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합니다. 스승에게 필요한 도움이 어떤 것인지를 요구하고 그 요구에 보답해야 합니다. 제자인 우리가 스승에게 보답하는 가장 올바른 길은 그의 지도에 따라 내 자신의 상구활동에 충실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품위의 한계에 대한 자각
한 개인이 정지하고 있는 한 그는 가치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상구자인 우리는 어떻든 우리를 한계지우는 현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알면서도 알지 못한다는 착각이 모르면서도 안다고 하는 착각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변신을 위해서는 훨씬 유리합니다. 아는 것이 없는 자는 아무 것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합니다.상구자는 최소한 그가 소재영역에서 어떤 것을 불확실하게 느끼고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세상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상태는 드뭅니다. 그 대신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모종의 편견, 선입견,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를 모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상구의 출발은 우리의 현재 품위에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품을 벗어남에 있어서 또 하나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시에 높은 품위로 비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적인 성취는 단계별 순서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각 단계마다 문제가 있고 해결이 있습니다. 언제나 잠정목표로서 한 품위를 문제시하고 그것을 단계별로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거나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내재적 동기,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려는 자주성, 그리고 그 자체의 보람으로 상구를 계속하려는 열정과 의욕을 손상시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당장 실현시킬 수 없는 수준의 비현실적인 목표는 당분간 보류하고 당장 성취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을 상구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상구를 통해서 실현시킬 수 있는 품위는 지금 내가 가진 품위의 다음 품위, 즉 차상품입니다.여기에 맞추어 상구의 목표를 구성해야 합니다. 그에 대한 판단은 어디까지나 상구자인 우리 자신의 몫입니다.
품위는 그것이 새로운 것으로 대치되지 않는 한 부패합니다. 이 위험지역을 탈출하게 하는 방부제가 문제의식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지적인 야심과 기대의 문제로서 우리의 용어를 빌어 말한다면 현품이 차상품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 대한 모종의 결핍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은 체계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에 대한 결핍의식 역시 체계성을 띠어야 합니다.학문적으로 의미 있는 문제는 엄격하게 말해 하나의 해답으로 해결될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설명이나 이해로 해답해야 할 모종의 체계적인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부류의 질문을 ‘문제의 틀’이라거나 혹은 ‘의단 (속에 늘 풀리지 않는 의심)’이라고 표현 해야 할지 모릅니다.
자신의 문제발견
우리는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삶을 영위하는 동안에 현재의 지식으로 적응하거나 이해하거나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접합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현상들이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은 사태의 비정상성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의 인지상태의 비정상에서 기인할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그 상황을 초극할 수 있는 이상적인 상태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됩니다. 아직 다른 상태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은 비정상적이거나 불확실한 실체로 우리에게 느껴집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 사태는 어쩔 수 없이 개인적인 것이고 그 소유격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문제를 규정함에 있어서 중요한 조건은 그 문제가 누구의 것이냐를 따지는 것입니다.일반적인 의미의 문제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 때 우리의 문제였던 것이 해결의 실마리를 얻자마자 문제의 자격을 잃습니다. 상구는 바로 그런 문제의 상태에서 해결에 이르는 과정적 체험입니다. 또한 후진인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와 성취해야 할 목표는 선진인 타인이 풀어야 할 문제와 성취해야 할 목표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맞지 않은 품위를 표적으로 삼는 것은 마치 자기 체력에 맞지 않은 운동처럼 좌절과 위험성을 동반하며 상구의 흥취, 희열, 탐닉을 방해합니다. 상구의 내재성을 보장하는 적당한 높이의 장대조절 혹은 적당한 거리의 표적설정이 중요합니다. 만약 상구자가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것은 상구의 시작점이기보다는 상구가 진행되고 있는 과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상구자는 스스로 범인이면서 동시에 탐정가인 위치에 있습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더 나은 자신을 발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삶의 과정에서 우리는 불확실하고, 의심스럽고, 혼란스러운 상황에 봉착하며, 이는 변화할 때가 되었다는 하나의 분기점으로서의 신호의 역할을 합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경험 안에는 항상 가능성에 대한 예상이나 불확정성에 대한 주체적인 선택과 투기, 그리고 이전의 논리를 초월하는 통찰과 직관이 작용합니다. 그러나 불확실함이란 개인에 따라 달리 규정되는 대상입니다. 후진인 우리에게 불확실한 것이 선진에게는 이미 확실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문제인 것이 선진에게는 이미 해결된 것들입니다. 상구가 갖는 그 불확실함과 문제는 주체적 규정에 준거해야 합니다. 상구는 자신의 현품적 지식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데서 출발하여 때때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이론적 예감, 매력 있는 지식에 대한 희망과 추측의 이끌림을 받으면서 진행됩니다.
모순과의 조우
상구는 언제나 혼돈을 향해 점점 위태롭게 다가가서 더욱 넓고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는 작업입니다. 태아는 자궁이 안전하다고 해서 계속 그 곳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다소 위험이 따르더라도 우리는 세상에 나와서 그것이 주는 도전에 직면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안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현품이 갖는 불안한 안전에서 무사히 탈출하는 길은 기존의 체험구조에 불균형과 혼란을 일으키는 무질서, 부조리, 불합리, 불가해, 패러독스, 모순, 혼돈, 혼미, 당혹스러운 사태와 만나는 것입니다. 그들이 부조리한 것은 그 사태 자체에 원인이 있다기보다는 우리의 경험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속단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그것에 마음을 열어놓고 상구자인 우리편에서 변형을 모색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접경한 차상품은 주체에게 참신함, 호기심, 관심, 흥미, 도전감을 통해 그 출구를 예고합니다.상구자는 그처럼 마음이 담긴 길을 추정하고 상구활동에 의해서 그것을 확증하는 순서를 택해야 합니다. 문제는 결국 우리와 환경의 상호작용의 불협화에서 기인합니다. 따라서 나의 문제와 너의 문제가 구분됩니다. 선진이 이미 해답을 얻은 것을 나는 문제로 삼을 수 있습니다.이 때문에 스승의 문제와 나의 문제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구자가 자신의 현품을 정직하게 노출시키고 환경, 그 중에서도 스승으로부터 오류를 지적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가 제시하는 예측할 수 없는 사태와 과제에서 현품의 한계, 문제, 변칙들을 자각해야 합니다.
상구열정의 유지
진정한 상구는 결과보다는 과정 자체에 몰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문제와 해결 사이에 상구를 추진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되는 호기심과 발견적 열정이 개재됨으로써 보장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상구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에 만족과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상구의 열정을 수반하지 않는 문제는 자신의 것으로 부적격합니다. 적당한 불확실성을 주는 문제는 분명히 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상구활동을 추동하는 내재적인 힘을 줍니다.우리가 추구하는 품위가 집중적인 노력을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신념이 생겨나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호기심, 기대, 희망은 지금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 일어날 일로 향하게 됩니다. 무슨 일이 어떻게 어떤 조건하에 일어날까요? 다른 한편으로 지적 관심은 그것을 추정하기 위한 증거, 지표, 징후를 얻으려는 관심입니다. 그 가운데 생기는 실험적 모험은 그 자체가 희열과 열중의 과제가 될 수 있습니다.
품위의 상승은 대기권의 탈출만큼 어렵습니다. 그것은 단기간에 그리고 타율적인 힘을 빌어 성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저것 비본질적이고 번잡한 것에 관심을 빼앗기고 분산시켜서 얻어질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가다가 중지한다면 아니 간만 못합니다. 일단 무엇을 배우려면 그것을 터득할 때까지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상구는 일단 주제를 선택하면 일시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장기간에 걸쳐서 그 주제의 본질에 몰입해야만 얻을 수 있는 전리품입니다. 우리가 하나에 집중하고 적은 십으로 분산되어 있다면, 이 쪽은 십 배의 힘으로 상대하여 싸울 수 있습니다. 이런 선택과 집중이 상구의 비결입니다.
상구의 열정은 충분한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차근차근 의미를 소화하면서 끊임없이 정진해야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때 경계해야 할 사항은 스승의 고압제입니다. 선진으로서 스승은 후진인 우리의 문제를 쉽사리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그의 현품을 준거로 우리의 문제와 상구의 과제를 부과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에 적극적으로 반응할 책임은 제자인 우리에게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때 그 문제의 근원은 외부에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추궁하고 자신의 문제를 자신의 내부에서 찾아야 합니다. 상구자가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자신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을 벗어난 문제는 올바른 문제라고 볼 수 없습니다. 만약 사태나 과제가 너무 높은 수준의 것이라면 그것은 상구자의 문제에서 벗어납니다. 일면 이해하면서 일면 이해할 수 없는 알 듯 말듯한 수준의 지식이 상구의 적절한 목표입니다. 훌륭한 스승은 물론 그 점을 유의하면서 하화에 임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 그 책임이 스승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상구자는 자신에게 알맞은 수준의 목표인 차상품을 선택해야만 상구의 능동적인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차상품에 대한 공략
현품과 미품은 전혀 다른 논리체계에 의해서만 변별적으로 기술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구에서는 상구자의 현품의 논리를 초월해야만 차상품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흔히 미리 정답을 예상하고 그 정답을 유도하는 것을 교육으로 규정하지만 정답은 교육의 상황에서 항상 분명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이탈, 변칙, 비규칙성입니다. 그것은 상구자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것을 미리 알거나 합리적인 것으로 수용할 수 있다면 우리가 지금 상구할 이유도 없습니다. 경험이 지향하는 목표는 어디까지나 미래의 어떤 상태입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듯이 상구자의 첫 공격목표는 차상품에 있습니다. 차상품의 관문은 상구자 자신의 거듭남이 없이는 진입이 불가능한 영역입니다. 품위의 차이는 총체적인 것인 만큼 상구자는 총체적인 변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차상품에의 진입은 잘못된 사고패턴을 지우고 그 자리에 올바른 사고패턴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상구자는 현품이 가진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로부터 자유롭게 생존할 수 있도록 자신의 구조적 변형을 시도합니다.이전의 자기를 죽이고 새로운 자기를 만나는 시간을 확보하는 데에는 휴식의 거부, 수면부족과 같은 시련을 견디어 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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