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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상호 깨달음 1 ㅣ 배움의 시작

*본 기사는 "교육의 재정의" 시리즈의 14번째 컨텐츠입니다. <클릭>해서 처음부터 보시는 것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어려운 단어가 있나요? 용어사전을 활용해보세요.

이번 챕터에서는 앞에서 다룬 교육의 수레바퀴를 기반으로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깨달음으로 이어지는데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은 배움의 전제조건과 교육적 관계의 형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아봅니다.

발전지향성

우리는 모든 점에서 완벽하게 유능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완전한 존재는 인간이 성취할 목표가 아닙니다. 이 사실이 허무주의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완전으로 향하고자 노력할 수 있고 그만큼의 진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후자의 사실에 큰 의미를 준다면 우리가 과실과 과오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 도리어 다행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과실과 과오는 거부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은 상구적 경험을 할 수 있는 소재의 역할을 합니다. 상구는 완전한 상태에 도달한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류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 자체의 성실성을 경험하고 유지하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삶의 질을 높여 나간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향상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습니다. 비록 백년을 산다고 해도 어리석게 산다면 그것보다 더 현명하게 하루를 사는 것보다 질적으로 더 나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사는 것은 쉽고, 그로 인해 우리는 잘못된 생활을 하곤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잘못을 범하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그것을 방관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이 있더라도 그것에서 빠져 나올 수만 있다면 세상은 달이 구름에서 나오듯이 더욱 환하고 진실하게 보일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상구라는 특별한 삶을 결코 중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상구를 할 때 항상 불안한 의혹에 사로잡히는 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길이 진정 옳은 것인가를 어떻게 판정할 것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처음부터 어느 곳으로 간다는 종착점이 예정되어 있다면 그것을 탐구한다는 말이 모순에 빠집니다. 수도계에 대한 상구는 그 종착점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고, 또 그 이유 때문에 하고 있는 특이한 실천입니다. 거기에는 항상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오도할 수 있는 위험성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역사적 업적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지향할 방향에 어떤 일관성이 유지되어 왔음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 방향을 향도할 모종의 안전장치가 우리 내부에 있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학문의 발전을 설명하는 인식론에서 중요한 부분은 진리를 지향하는 우리 자신을 무턱대고 믿는 것이 아니라 오도의 가능성을 충분히 우려하면서 어떻게 그런 올바른 지향을 할 수 있느냐를 해명하는 데에 있습니다.

절대적 확신의 거부

우리는 세계에 관해서 전적으로 무지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얼마만큼 그것에 관해서 알고 살아갑니다. 또한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단정은 우리가 그것을 진정 사실로서 믿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진실임이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세계에 관해서 이해하고 그 지식을 평가하는 데 동원할 수 있는 최선의 기준은 우리 각자가 가진 현재의 품위입니다. 세계는 현품에 맞게 동화되고 해석됩니다. 이것은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이례적인 상황에서도 명백함, 평범함, 익숙함, 친밀함, 당연함, 납득할만함의 기준으로 작용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흔히 깊게 따져볼 필요가 없이 지금의 상태에서 부담 없이 금방 이해할 수 있는 사실들만을 실재로서 인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각 개인이 그가 가진 지식을 진리라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큰 잘못은 아닙니다. 각자가 스스로 틀렸다고 생각하는 신념체계를 어떻게 견지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어느 정도나마 확실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믿고 또한 의존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이해하는 것을 진리라고 규정하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탐구를 종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내용이 진정 더 이상의 문제가 없는 완전무결한 것인가에는 항상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만약 세계가 미궁의 것을 포함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현품의 지식에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그것에 고착된다면 우리는 자신이 만들어 낸 울타리에 갇힌 독단주의자나 광신주의자가 될 위험에 스스로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많은 경우 우리가 현품에 대한 애착을 갖는 것은 그것이 아직까지 우리가 가질 수 있었던 것 가운데 최선의 신념이나 지식이라는 데 있을 뿐, 그것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상구자로서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는 품위에 집착하지 않으며 그것에 전적으로 의존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지금의 지식이 의심스럽고 그보다 나은 지식이 우리에게 가용한 상태에 있다면, 우리는 후자를 선택하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품의를 갖고 싶어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아직 확보하고 있지 못한 데에 있습니다. 상구는 바로 그런 가능성 있는 대안을 실현시키는 과정입니다.

미지의 품위에 대한 판단유보

우리는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상구라는 자기형성의 자유와 책임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과거의 우리가 현재의 우리가 아니듯이 현재의 우리가 미래의 우리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주도 아래 과거를 돌아보고, 자신이 처한 현재의 위치를 파악하고 더 향상된 자신을 실현시키는 일이 남아있습니다. 인간성은 형성과정에 있으며 영원성의 관념적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각 개인의 동일성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속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규정짓는 것은 규정하는 사람과 그 시대의 한계를 늘 반영하고 있을 뿐입니다. 모든 사람을 실현태로서의 현품을 토대로 앞으로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속단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인간은 주어진 운명을 넘어서서 스스로를 초월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독립적인 사람은 자신의 소양과 가능성을 스스로 닦아 나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바꿀 줄 모르는 사람은 흐르지 않는 물처럼 부식하기 마련입니다.

상구의 탐조등에 비추어 보면, 인간성의 깊이가 얼마나 컴컴하고 먼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것을 찾기를 주저하고 현존의 밝음의 상태로서 바람직함을 규정하고 향유하는 것은 사실은 가치를 추구한다기보다는 바로 제자리에 갇혀 있는 상태로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현존상태가 최고의 것이라는 환상 이상의 어떤 것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학문의 목적은 말할 필요도 없이 더 나은 지식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나은 지식이 나에게 아직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좋은 것인지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자신의 능력 밖으로 벗어나는 것입니다. 미지의 것은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어야 하며, 결코 그것은 판단의 대상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각자는 어디로부터 유래하여 어디로 가야할까요? 세계는 항상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미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식활동의 기본가정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내가 알 수 없었던 수준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이미 확보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한 태도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현재의 낮은 수준의 지식으로써 그것을 미치지 못하는 실재의 세계를 속단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특히 우리의 선진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의 품위보다 높은 지식을 가진 사람을 우리의 품위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어떻게 후진이 선진의 지식을 이해하고 감식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올바른 방식은 당분간 판단을 유보하거나 그것에 대해서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는 자격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인식주체의 바람직한 변형

만약 우리 앞에 우리가 가진 품위보다 더 높은 수준의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 지식을 이미 습득한 선진이 있다면 우리는 탐구를 통해서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려면 먼저 우리는 우리의 지식을 유치하고 저급한 것으로 간주해야할 것이며, 높은 것에 대해 응분의 소망과 존중심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없이 높은 수준의 지식을 동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가진 지금의 미숙한 품위를 방어하거나 고수하는 것은 더 높은 품위를 판단하는 올바른 전략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지금의 품위가 갖는 독단의 요소를 식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개선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높은 수준의 지식과 선진을 당당하게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으려면 먼저 우리가 그 품위에 도달하고자 노력해야만 합니다.

진리의 원천은 먼 곳에 있지 않고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것을 체험하려면 우리가 스스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해야 합니다. 현존의 상태는 다른 대안적인 것이 없는 상황에서 잠정적으로 나에게 최고의 것이라는 사실 이상의 어떤 것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동적인 의미의 진리는 자신의 현품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은 품위에로 옮겨가는 운동의 상태에서만 식별됩니다. 객관적인 현실과 나 가운데 변해야 할 부분은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자면 우리는 먼저 객체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현품이 갖는 한계를 인정하고 자각해야 합니다. 새로운 상황에서 해결되어야 할 야심적인 문제를 찾고, 다음에 자신을 쇄신하여 그것을 해소하는 새로운 지식을 얻고, 그 얻음에서 진정한 의미의 진리를 체험하는 순서를 차근차근 밟는 것입니다.

선진 찾기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무수한 사람들이 인간이 가야할 길을 모색해 왔습니다. 이 때문에 누구도 간 일이 없는 처음 가는 길이란 거의 예외적인 것입니다. 어떤 대상이나 주제를 탐구하던 간에 그것에 대해서 먼저 탐구를 시작하고 더 나은 지식을 확보한 선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인이 아는 것이 곧바로 나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진정 바람직한 지식이라면 그것은 나에 의해서 다시 확인되어야 합니다. 그 타인의 것이 나의 것으로 확보되지 않는 한 그것은 나에게 확실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교육에서 상구는 많은 경우 이미 선진이 얻어낸 높은 수준의 지식을 나를 통해서 재확인하는 절차를 밟습니다. 우리에게 요망되는 것은 그런 결과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산하고 얻어내는 과정을 재생시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상구는 우리에게 있어서 항상 새롭고 창조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영역이든 간에 내가 중간의 위치에 있다면 나는 반쯤 후진이고 또한 반쯤 선진인 셈입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선진의 수가 적다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을 식별하고 나의 상구를 위한 안내자로 유인하고 확보하는 일이 어려울 뿐입니다. 먼저 어떻게 선진을 식별할까요? 품위는 세속계적인 지위와는 달리 겉으로 식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설사 곁에 선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품위는 상구자가 정당하게 해석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다는 애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선진 찾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의 품위를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선진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간접적인 단서는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재 영역에서 널리 명성을 가진 사람, 공적인 자격심사와 풍평을 획득한 사람, 걸출한 제자를 배출한 사람들은 일단 선진의 대열에 듭니다. 또한 그들은 내가 풀지 못하는 문제를 쉽게 풀고, 내가 위기라고 보는 상황을 어렵지 않게 대처해 나갑니다. 이런 것들이 그들의 선진성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징후들입니다.

선진에 대한 겸손과 개방성

그러나 징후에 의한 선진의 식별과 그 선진성을 우리가 체험으로 직접 증거하는 것간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일차확인에 불과할 뿐 나의 확인을 거친 것은 아닙니다. 선진의 지식 수준이 얼마나 높든 간에 그것은 그가 오랜 상구를 통해서 얻어낸 지식일 것입니다. 그것은 상구자인 나에게 그 수준의 차이만큼이나 교육의 공간과 소재로 남아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선진과 나와의 품위의 차이는 그 공간만큼 내가 수행하고 보충해야할 상구활동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만약 타인의 지식이 나의 것보다 다섯 단계 더 높은 품위의 것이라면 그것을 이해함에 있어서 나는 다섯 단계의 상구를 더 수행해야만 합니다. 한편으로 지금 내가 가진 지식을 의심하고 해체하고 그보다 더 나은 것을 구성함으로써 나는 그 마지막 단계에서 선진의 품위를 비로소 이차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진로는 이미 선취한 지식으로 규정될 수 없습니다. 그 곳으로 향하는 길의 관문은 우리의 현존하는 사고의 편협성을 버리거나 깰 때 비로소 열립니다. 자신이 약간 귀가 먼 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것을 듣습니다. 전자는 되물으며 후자는 물을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오류가 있고 타인에게 정답이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항상 그로부터 배울 수 있는 여지를 발견합니다. 상구자의 덕목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으려는 신중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오를 발견하고 제거하려는 지적 정직성과 과단성에 있습니다. 우리의 주관에는 이전처럼 절대적 확신이 있다기보다는 오류의 상대성이 있을 뿐입니다. 오류 가능한 것으로 자신의 한계를 인지한 이상 그것을 벗어나는 길은 위로 열려 있습니다. 상구는 전에 보지 못했던 어떤 것들이 스스로를 새롭게 드러내는 곳에서 비로소 생산적인 것이 됩니다. 그것들에 대해서 항상 겸손과 열려있는 태도를 보일 때 그것들은 우리의 협력자가 됩니다. 선진을 스승으로 만드는 지름길은 자신을 후진으로 낮추고 선진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청교

처음 가는 길은 드뭅니다. 따라서 상구자는 항상 그 앞에 나타난 선진을 몰라보지 않을까 걱정해야 합니다. 이미 학문계에는 자신보다 앞서 간 선진들이 있고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들이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는 상구의 중요한 자료나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상구에는 외부의 도움이 없이 이루어지는 일차상구와 이미 앞서 간 선진의 지도를 받는 이차상구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후자는 전자에 비해서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줄인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상구자는 그의 미품을 이미 과품으로 확보하고 있는 선진을 찾아 그에게 청교, 즉 하화를 요청함으로써 그가 경험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자신이 획득한 상위품위를 후진에게 공유하고자 하는 많은 선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즐거이 우리의 청교에 응할 것입니다.

옳은 스승을 만나 도를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선진이 자동적으로 나의 스승이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구자가 그들을 스승으로 유도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스승을 얻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선진들에게 제자가 취할 태도를 견지하는 것입니다. 선진에게 겸허하고 배우려는 열성을 보일 때 그 상구자 앞에 스승이 나타날 확률은 점차 높아집니다. 선진을 찾아가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하화하기를 청해야 합니다. 또는 이미 있는 선진의 하화공간을 몸소 찾아가 그 곳에 머물며 그곳의 사람들이 하는 생활에 참여할 수 있기를 청해야 합니다. 그 곳은 새로운 규칙과 위계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여기서는 모든 세속계적인 욕구나 지위가 갖는 효력을 정지시키고 수도계가 요구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요구에 순응해야 합니다.

청교의 순서는 세속계적인 사업가들이 협약하는 순서와 반대입니다. 사업가는 상대편이 어떤 상태와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내고 그것을 토대로 협약합니다. 그러나 상구자는 선진으로부터 배울 내용을 미리 알 수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선진이 아무리 그가 아는 바를 말로 드러내고자 한다고 할지라도 후진인 우리는 그것을 지금으로서 당장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추측하는 것조차 무모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사업의 경우처럼 배우기도 전에 스승에게 배울 것에 대해서 미리 알려고 하거나 설명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상대를 믿고, 그의 지도를 받고, 상구를 진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점차 그 믿음을 확인하는 순서를 밟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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