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수레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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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드디어 저 백진우가 생각하기에 교육본위론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의 수레바퀴에 대해 공부할 것입니다. 바로 교육이 어떤 식으르 이루어지느냐에 대한 답변인데요,그 전에 앞에서 공부한 것을 검토해보도록 합시다.
수도계에서 최종적인 품위가 무엇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 대한 완성태는 현실적으로 알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도계의 품위는 언제나 잠정적인 거처이며 항구적인 거점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입니다. 한 품위의 수준은 그보다 높은 것에 비해서 낮고, 낮은 것에 비해서 높은 변증성을 지니고 있습니다.역사적으로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포개지는 수많은 매듭을 만들고 그것을 상하로 오르내리는 운동을 하면서 각 단계의 품위의 내용을 다소간 입증해 왔습니다. 품위는 언술화에 의해서 객관화될 수 있지만, 그것은 흔적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그 특정 수도계의 품위를 우리의 형편에 따라 주관적으로 체험하고 있으며, 그 제한된 주관에 의해서만 그것을 의미있게 해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수도계의 품위의 실재성과 그 가치를 나와 타인에게 입증하는 절차와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와 관련해 드디어 우리의 논의의 핵심을 차지하는 교육의 세계가 드러나게 됩니다. 장상호는 교육계가 수도계의 각 품위 사이에 장치된 모종의 자율적인 구조의 형태를 띤 것으로 가정합니다. 교육계는 인간성의 수직적 상승을 촉구하는 두 가지 상이한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각자가 수도계에서 차지하는 현재의 품위수준을 중심으로 한층 더 높은 품위를 계발하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의 바람직성을 타인에게 전파하는 과정입니다. 하나는 위로 향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아래로 향하는 길로서 본질상 그 내용이 다릅니다. 그 활동의 물리적인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는 상구와 하화라는 새로운 용어를 도입했습니다. 이들은 개인이 수도계의 수직적인 관문이 요구하는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를 가지고 그것을 오르내리게 하는 서로 다른 장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상구와 하화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볼 것입니다. 이 상구와 하화는 각각 고유한 요소를 가지고 전체를 구성합니다. 그리고 그 두 국면은 상호보완적인 양상을 띠면서 개별적인 것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전체적인 특성을 출현시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총체적인 세계를 대표하는 말로서 경우에 따라 “상구계”와 “하화계”라는 말을 쓸 수도 있습니다. 상구와 하화의 구성요소와 그들이 서로 관련지어 구성하는 세계는 상호작용합니다. 특정한 수도계를 중심으로 품위면에서 앞선 선진과 뒤따라오는 후진은 각각 하화계와 상구계에 종사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그 상호작용의 양상이 하나의 독특한 교육의 총체를 구성합니다. 이 때 출현하는 또 하나의 전체적인 양상은 협동교육의 구조를 취합니다. 각각의 요소와 그것들이 구성하는 전체의 양상은 편의상 이와 같이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구조의 결정적인 특징은 어떤 전체가 있고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의 의미가 서로간의 관계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데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점은 그들의 의미가 그 구조 밖의 어떤 외재하는 사실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장상호가 제시하려는 것은 단지 교육이 그 나름의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교육의 내용”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데 있기 때문에 가능 한 대로 약식의 구조만을 예시해 봅니다.
우리의 모델에서는 상구계와 하화계가 각각 서로 대비되는 여섯 개의 하위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상구계와 하화계는 각각 자신의 요소에 의해서 하나의 특징 있는 전체를 구성하면서 다시 서로간의 구분되는 요소의 대비에 의해서 또 하나의 공조체계를 구성합니다. 상구계와 하화계를 구성하는 각각 여섯 개의 요소들은 연합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들은 그 구조내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다른 한편, 협동교육의 경우 상구의 요소와 하화의 요소는 서로 상합적 관계를 갖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림에서는 대각선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표시되었습니다.
잠시 연합적이라는 것과 상합적이라는 것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장상호는 여기서 이 두 개를 언어학적 관점에서 설명하는데요, “해가 빛나고 있다”라는 문장을 통해 이 두 개의 뜻을 알아보겠습니다. 연합적인 것이란 “해가”, “빛나고 있다”와의 관계를 뜻합니다. 즉 서로 순서를 맺으며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합니다. 상합적이란 “해가”와 “달이”, 혹은 “전구가”와 같은 관계를 가진 것으로, 서로 대체할 수 있는 요소들을 이야기합니다.
이 모형에서 주목할 점은 교육은 서로 다른 요소를 가진 상구와 하화의 세계를 가진 자율적인 세계라는 사실입니다. 상구계와 하화계는 서로 대비되는 가운데 교육이라는 세계의 전체적 의미를 구성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특히 다음의 인식론적인 논의와 관련하여 주목할 부분은 상합적 관계에서 상구와 하화에 소속한 요소가 일정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그 내부적인 조정이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상구에 속한 자리와 하화에 속한 이타가 전치되는 경우 그 구조전체에 불균형을 가져오며, 그들간의 관계는 재조정되어야 합니다. 혹은 상구와 하화간의 이런 불균형은 협동교육을 방해하거나 와해시키는 요인이 됩니다. 서로 연합적으로 연결되고 또한 상합적으로 대비되는 교육의 요소들을 개별적으로 서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행위의 동기
상구와 하화는 기본적으로 인간성의 향상에 대한 열정과 책임이라는 행위의 동기를 갖습니다. 그것은 품위의 차이에 잠재된 에너지로 교육의 여러 다른 조건들의 조성과 더불어 드러납니다. 상구와 하화에서 열정과 책임은 내용상 자리와 이타의 대비로 나타납니다.상구는 교육주체가 자신의 결핍됨을 풍요의 것으로 대치하려는 자기사랑의 동기에서 출발합니다. 이에비해 하화는 후진에 대한 연민과 헌신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사랑의 형태를 취합니다. 이것들은 서로 다른 동기이면서도 서로 상승적으로 교육적인 유대를 맺게 하는 순수한 에너지로 작용합니다.
상대주의적인 조망
품위의 차이는 어느 경우나 상대적인 것으로서 교육주체는 각각의 품위에 비추어서 세계와 타인에 대한 인식하기 마련입니다. 어떤 수준의 품위도 그 단계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가치를 대표합니다. 다만 그 단계의 밖에서 볼 때 비로소 그것은 최선의 것이 아님이 드러납니다. 교육은 그러한 현재의 품위가 갖는 독단을 떠나 상대의 교육주체를 인식할 태도를 요구합니다. 여기서 존현과 존우의 대비와 조화가 필요합니다. 상구자는 현재로서 상위품위나 그것을 가진 선진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알고 그는 선진을 존중하고 그들의 현묘함에 대해서 속단을 해서는 안됩니다. 한편, 하화자는 후진의 품위를 당분간 존중해야 합니다. 후진은 선진에 비해 어리석은 것이 특징이지만 후진 자신에게는 그것이 결코 어리석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가 현재 지니고 있는 품위는 현재로서는 그에게 최선의 것으로서 자존의 핵을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화자는 상구자가 다른 대안적인 품위를 습득하기 전까지는 상구자가 가진 지금의 품위를 이해하고 시인하고 공감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계의 배열
인간은 여러 방면에서 단계적 상승을 꾀합니다. 그 활동의 하나로서 교육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끊임없이 도달하려는 노력을 하지만 그 최종의 단계에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교육은 바로 그 과정 자체입니다. 여기서 과정을 생략하고 열매만 거두려는 조급한 태도는 교육 자체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조급하게 서두르면 교육의 모든 것을 그르칩니다. 교육의 표적은 품위의 최후의 수렴점에 도달하기보다는 상구자가 현존하는 품위에 적응하는 방식으로 조정되어야 합니다. 상구와 하화라는 과정은 이런 특성상 서로 순차와 역차의 대립된 양태로 대응해야 합니다. 상구자는 일시에 최선의 것을 구하기보다는 항상 차선의 단계를 표적으로 하여 전진해야 합니다. 한편,하화자는 자신이 가진 현재의 품위를 당장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 되고 과거를 단층적으로 심도 있게 회고하고 후진이 위치한 곳까지 역진하여 그 곳에서부터 하화를 추진해야 합니다. 이 각각의 단계별 적응은 동굴의 신화에서 명적응과 암적응의 것으로 비유되어 있습니다.
변형적 활동의 형식
품위를 달리하는 선진과 후진은 서로가 변신을 하지 않고는 상호침투나 교육적인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여기에는 형식논리를 초월하는 활동이 필요합니다. 상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이며, 하화는 모르는 사람을 알게 한다는 역설을 포함합니다. 이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서 전진적인 자조와 퇴행적인 원조라는 대비되는 활동이 필요합니다. 상구자는 지금의 품위를 파괴하고 그 위에 새로운 품위를 건설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문제의 발견,새로운 가능성의 탐색, 체험의 재구성 등 스스로 자신과 싸우는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로써 그는 비로소 “허물벗기”에 성공합니다. 한편, 하화자는 그가 이미 상구를 통해서 후진보다 높은 품위를 얻었지만 상구자의 그것을 대행할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촉매로 작용하여 상대편의 활동과 에너지를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제한됩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가끔 안으로는 현명하면서 밖으로는 내색을 감추는 허물쓰기를 수행해야 합니다. 그는 적당한 거리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이미 알고 있는 답을 모르는 척하며, 상대편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미래를 예고하는 등 제반 길잡이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인간의 위대성에 대한 증명의 방식
수도계의 품위는 인간의 위대성을 보이는 서열로서 판단의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내재적 가치는 신성한 교재, 공동체의 의지, 다수의 의견, 강자의 강권 등에 호소해서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참된 가치는 일방적인 강요가 아니라 내부의 주관적인 보람으로 체험되어야 합니다. 훌륭한 가치를 절대적으로 규정한다거나 주체의 체험과 무관하게 객관적인 것으로 강요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반가치적인 처사입니다. 품위의 가치는 우리가 그것을 안에 간직하는 것 자체로서 보람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간직하기 전에 그것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오류입니다. 교육은 바로 그것을 간직하게 하는 과정을 하나의 요건으로 삼습니다. 여기서 자증과 타증의 조화가 중요합니다. 자증이란 상구자가 한층 더 높은 품위를 획득하고 나서 이전의 품위가 갖는 어리석음과 새로운 품위의 고귀함을 스스로 깨닫고 그것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찬의를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타증은 하화자가 선진으로서 후진을 자신의 품위수준에 가깝게 올려주고 그의 품위가 후진의 것보다 높은 것임을 추후에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증과 타증의 절차를 거쳐야 비로소 수도계의 가치는 만인에게 보편적 가치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항상 인간으로서 위대함에 대한 공환적인 축제의 요소가 있습니다.
결과의 주체적 의미
수도계에서 선진과 후진의 존재는 비동시적인 품위가 같은 공간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수도계에서의 창조의 기준은 그 엄밀성에 있어서 교육계의 것과 큰 차이가 납니다. 전자에서는 전체 공동체에서의 독창성을 의미하지만 후자에서는 재창조까지를 창조활동에 포함시킵니다. 이렇게 볼 때 교육에서는 같은 결과를 놓고 상구자와 하화자의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상구자에게는 분명히 새로 획득한 품위가 혁신의 의미가 있으나, 하화자에게는 이미 자신에게 알려진 것을 보강하는 보수의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혁신과 보수의 절묘한 조화를 볼 수 있습니다. 하화자에게는 보수적인 것이 상구자에게는 혁신적이라면 그것은 매우 알맞은 교육적인 만남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한 시대의 혁명가가 다음 세기의 보수자가 되는 방식의 조화에 의해서 이제까지 발전되어 왔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교육이 하나의 구조적 총체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육계와 비교육계간에 구분될 이유를 구성합니다. 교육 내부에도 서로 다른 구조를 가진 하위요소로서 상구계와 하화계가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 불가분의 관련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구분될 수 있는 분명한 하위구조를 각각 형성하고 있음을 우리는 살폈습니다.교육의 제반요소는 그 의미가 개별적으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불가분의 상관관계를 맺고 결합되어 있습니다. 상구와 하화의 요소는 각각 일련의 계열적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각각의 요소는 상구와 하화에서 서로 대비적인 특성으로서 결합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상반된 음양의 대비에 의해서 상구와 하화는 서로가 상대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내재적인 필연성이 자율적으로 인정될 때 교육은 교육다움을 유지할 수 있고 그 교육의 바퀴는 정상의 궤도를 따라 발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육의 두 가지 특징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교육이 각 수도계의 모든 품위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수도계에서 절대적인 품위는 없습니다. 우리는 현명하면 현명한 만큼 항상 하화에 종사할 수 있고, 어리석으면 어리석은 만큼 상구에 종사할 수 있습니다. 교육에는 열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도계에서는 최고의 품위를 가진 사람에게만 최고의 영광이 주어집니다. 이 점에서 귀족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에 비해 교육계에서는 원칙상 수도계의 어느 품위에서나 같은 정도의 열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육은 평민이나 천민들도 귀족과 똑같은 보람과 가치를 향유할 수 있는 활동이고 게임입니다.
교육이란 임의의 수도계의 품위를 소재로 위로는 상구계를 추구하고 아래로는 하화계를 추구하는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교육 자체를 위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입장을 취할 때 수도계는 교육을 위한 수단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수도계는 교육을 위한 소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모든 수도계가 교육을 위한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그것들을 수단으로 삼아 우리는 한편에서는 상구계를 추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하화계를 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교육은 그 자체로서 열광하고 그것에 몰입할 수 있는 내재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상구하고 하화할 욕구와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특수한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것만으로도 인간생활은 잠시나마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입장을 바꾸어 우리가 특정한 수도계 내에서 볼 때 교육은 수도계의 내재적 가치를 확인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개인으로서 교육의 주체는 오류에 차 있습니다.만약 인간이 오류가 없고 불멸하는 존재라면 교육의 역사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부족하고 대개 100년 이내에 죽음이 예정된 존재에 불과하지만 자각적인 개체인 까닭에 스스로를 이 “개별자”로서 뿐만 아니라 인류의 “대표자”로서 인식합니다. 교육의 주체로서 우리 개체는 바람직한 인간성의 형성자이며, 감상자이고, 비판자이며, 확인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모순과 갈등이 불가피합니다. 우리 개개인에게는 교육을 통해서 스스로를 바람직한 인간을 실현시킴으로써 주관적으로 깨닫고 그것을 타인에게도 상호주관적으로 깨닫게 할 의무가 있습니다. “갑”의 고귀함이 곧바로 “을”의 위대함이나 고귀함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스스로 위대해지거나 고귀해지지 않고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 각자는 타인을 고귀하게 만들지 않고 자신의 고귀함을 입증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다음의 논제인 자증과 타증이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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