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가치와 소재 2 ㅣ 교육의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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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X를 배우고 가르친다’는 말에 익숙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법에 충실한 나머지 X가 목적이고, 교육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세계를 구분함에 있어서 어법적인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자장면을 먹는다’는 말에서 먹는 것이 목적이고 짜장면은 수단에 속함을 엿볼 수 있듯이, 앞서의 어법에서는 X는 교육의 입장에서 볼 때, 교육을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의 의미를 지닙니다. 여기서 교육의 소재란 그 X에 해당하며, 더욱 정확하게는 수도계 전체를 지칭합니다.
교육학자 또는 교육을 고민하는 사람은 수도계의 특정한 종류와 품위의 규정에 말려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교육학자의 역량을 벗어나는 일입니다. 수도계에 대한 연구는 다방면에서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그 모든 과업이 교육학도에게 주어진다는 것은 허황된 생각입니다. 수도계는 종류나 수준이 거의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은 누구에게나 미궁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각 수도계 종사자들의 탐구과제가 될 것입니다. 교육학 연구는 그 가운데 교육을 위한 수단이라는 관점에서 수도계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교육의 입장에서는 어떤 종류 혹은 어떤 품위의 수도계이든 그것은 동일한 교육적 가치를 갖습니다. 그 어떤 것도 교육을 위한 무수한 선택지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교육학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 수도계의 발전과정에 개재하기 마련인 교육에 주목하고 그것을 교육의 입장에서 재조명하는 일입니다.
제 1기 교육학의 입장에서는 현존의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가 교육소재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교과서의 의미는 너무도 확장되어 심지어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는 통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과서라는 것의 정체를 파악한다면, 그것의 소재로서의 의미는 극히 제한적인 것입니다. 우리나라 학교교육의 경우, 한 때 구학문을 가르치다가 이후에 그것을 신학문으로 대치했습니다. 대부분 이성을 앞세우는 서구문화의 지상주의를 따르는 이론이 교과서의 선택에 무분별하게 도입되어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문화적 제국주의나 종속주의의 독소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교과서는 또한 수도계의 종적 측면인 품위의 선택에 있어서 지극히 저차원적인 인식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미 객관적으로 공인된 최근의 지식을 정답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논리적인 형식에 따라 망라하여 편집한 뒤, 일률적인 일정에 맞춰 가르칩니다. 이 때문에 학문의 내재적 가치가 손상되며, 인간이 공유하고 향유해야 할 품위가 학생들에게는 문명의 부담과 압력으로 작용하면서 그들이 문화의 향유자가 아니라 문화의 노예로 만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만약 학교의 교과서가 이처럼 사용자에게 상구나 하화의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없는 것이라면 적어도 교육의 입장에서 그것은 생명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교육의 소재는 학교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교과서의 내용의 범위를 훨씬 벗어납니다.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교육을 통하여 조금 더 나은 인간의 자기본질을 추구하려는 노력은 다양한 방향에서 드러났습니다. 가상세계의 속박에서 벗어나 이데아의 세계로 접어들어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 나타난 서양의 학문, 사리사욕을 극복하고 천리의 공을 회복할 것을 강조한 유가의 극기복례, 유의 세계에 대한 집착에서 공의 세계에로의 해탈을 강조한 불가, 속세의 사사로운 것으로부터 때묻은 몸과 마음을 청정무구한 몸과 마음으로 바꾸는 도가의 환골탈태의 노력 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이 이외에도 바둑, 검도, 선가, 예술, 도덕 등 무수한 선인들이 자신들의 인간성을 추구하고 고양하면서 남긴 이름 모를 수도계들이 허다합니다.
수도계에서 개발된 품위는 인류전체에게 소중한 보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보물이며, 나누면 나눌수록 더 증가하는 보물입니다. 그것은 사사로운 보물에 그쳐서는 안 되며, 만인에게 그리고 세대를 거치면서 공유되어야 합니다. 그 존재성이나 의의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동화하고 재창조하는 개인이 있음으로써만 입증될 수 있습니다. 과거를 재생시키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현재로서 재창조 혹은 재구성될 수 있을 뿐입니다. 만약 재창조에 실패한다면, 우리들의 세대는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아이러니를 체험할 뿐만 아니라, 그 역사적 유물들의 정신을 사멸시키는 원죄를 범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교육의 소재가 될 만한 ‘문화유품’이 많습니다. 이들은 수도계의 외적 표현들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교육적 수행에서 얻은 결과물들입니다. 그러나 결과만을 모방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로 참다운 생명력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위대한 인물의 말씀이 열등한 대중에게 올바르게 전달되는 경로는 항상 복잡한 절차를 포함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소통의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위대한 인물의 말씀은 대중이 현재로서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정보가 못됩니다. 또한 그들이 당장 그것을 배워서 습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서로 수준이 다른 지식과 정보의 여과 없는 만남은 혼란스럽습니다. 최정상의 품위를 일시에 주입하려는 조급한 시도는 종교분야에서 교조화의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일방적으로 혹은 수동적으로 제시되는 정보는 각 단계에서 정보왜곡을 일으킵니다. 같은 음악의 악보를 가지고도 그것을 연주하는 사람들의 실력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똑같은 기호나 글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의 품위에 의해서 걸러집니다. 이 때문에 그들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확정되지 않은 채 시간과 더불어 변하고 유보됩니다.
인류가 쌓아온 정신적인 유산은 우리 모두의 향유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같은 공간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간에도 다른 품위를 나타내는 선진과 후진이 있고, 그들이 그것을 수용하는 정도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유산에 질서를 부여하려면, 그것의 발전과정에 포함된 각 단계의 모순의 발생적 계열화가 이루어져야 하고, 그 사이마다 어떤 교육의 형태가 작용했는지에 대한 탐구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 간의 논리만을 강조하는 변증법만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성의 공환의 측면은 좀 더 긴 기간의 수련과정에 의한 확장적인 설명을 요구합니다. 궁극적으로는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각 단계의 교육의 과정이 재생되고, 그 과정에 우리가 몸을 던져서 참여해야만 합니다.
교육의 소재로서의 수도계는 각 단계마다에 존재하는 세계규정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품위간의 차이를 매개하고 해소하는 과정에 의해서 수도계의 이해가 가능하게 됩니다. 현존하는 수도계에는 필히 교육이 개재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무수한 종류와 수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준마다 교육의 과정이 작용했을 것으로 가정됩니다. 그 교육에 대한 요점에 대해 우리는 앞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품위상의 차이는 평면적으로 모순되는 상태에서 무질서하게 산포될 것입니다. 수도계는 그 사회적 특성보다는 보편적 가치로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사회화의 대상이 아니라 교육의 대상입니다. 발원지가 동양이냐 혹은 서양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이 연구는 문화 간의 비교와 우열의 판정과 관련하여 대두되는 소위 ‘문화상대주의’라는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것은 수도계의 종류를 의미하는지, 혹은 수도계의 품위수준을 의미하는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전자의 상대성과 후자의 상대성은 어떻게 교육계에서 해석되어야 할지, 또한 교육의 소재면에서 시공간에 따라 차이가 나도록 하는 결정요소가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에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사항은 각 수도계의 단계에 따른 품위와 그것을 소재로 해서 일어난 교육의 다양성입니다. 이 측면에서 우리는 우선 각 수도계에서 다루고 있는 교육의 양상을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각 수도계는 그 나름의 과제 중에 교육의 문제를 하위 요소로 취급해 왔습니다. 예컨대, 미술이라는 세계에는 미술실기, 미술사, 미학, 미술평론, 그리고 미술교육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학문과 각종 기예의 경우에 ‘교육’의 과제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때 그들이 말하는 교육의 내용은 무엇이며, 거기에는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어떤 수도계도 그 역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역사가 스스로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의 실천이 그것을 보장합니다. 어떤 수도계는 역사의 유물로 정지하고 있음에 비해서 다른 수도계는 아직도 발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들 수도계에서는 전위자들에 의해서 이전의 것을 파기하고 첨단을 확장시키는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최종적인 것을 후위자들이 곧바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후위자는 전위자가 거쳐간 역사적 경로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교육의 정신과 절차가 개입함이 없이는 문명과 문화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수도계가 항상 발전한 것만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 퇴보한 적도 많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도계가 심지어 사라진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애초부터 그릇된 수도계일 수도 있지만, 여타의 이유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수도계의 발전은 각각의 품위에서 교육의 바퀴가 거침없이 활기차게 돌아감으로써 가능합니다. 이 교육의 바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음 챕터에서 다룰 것입니다. 수도계는 최종적인 품위를 보존하는 것으로 족하지만, 교육은 거기에 오르기까지의 각 계단을 진실한 것으로 보존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전자의 것은 후자의 것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런 교육의 활성화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 수도계의 퇴보나 사라짐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 가능성이 검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역사적으로 일부의 수도계는 배태, 발전, 쇠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각종 동양적인 수도계가 오늘날 세계적인 것으로 보편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토인비는 역사를 “도전과 응전”으로 설명합니다. 도전이 지나치게 강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약할 때 집단의 운명은 쇠퇴와 몰락의 길을 밟습니다. 이때 “지나치다”는 말의 의미는 응전하는 주체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교육이 차지하는 역할은 어떤 것인가요?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은 후대는 선대의 미결사항이 기결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현대인은 몇 십년 전만 하더라도 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던 지식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훌륭한 교육적인 삶을 환생시킬 수 있습니다. 수도계의 교육적인 진화가 점차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생 속에는 교육의 과업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상구하는 것은 좋으나, 성인이 되어서도 상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또한 나이가 많을 때 상구보다는 하화가 더 비중이 크지만, 젊음이 반드시 하화의 결격사항은 아닙니다. 생애의 발달단계에 알맞은 소재를 발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아동의 것은 종류나 수준에서 성인의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성인들은 어린이들이 진정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상구의 소재를 알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하화의 교육권을 장학하고 있는 성인들은 그들 나름의 소재를 강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편 교육의 소재는 항구적이고 고정불변한 것이 아닙니다. 사상의학에서 환자의 체질에 따라 처방이 다르듯이 교육주체가 자신의 현실의 제약 속에서 선택해야 될 교육의 소재는 유동적이고 적응적인 것입니다. 한 개인에게 혹은 한 집단에게 교육의 소재가 되는 것이 그대로 다른 개인 혹은 집단에게 같은 기능을 갖지는 못합니다. 교육학자들은 이 때문에 다양한 것들을 소재로 하는 상구자료와 하화자료를 제작할 수 있는 원리를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역사적 발전의 체험은 그 발전의 계열을 반복할 수 있을 때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을 생략하고 최종적인 결과가 다음 세대에 그대로 전달될 수 있을까요? 흔히 학교에서 학문을 소재로 하는 교육은 진리를 가르치고 배운다는 명분을 세웁니다. 학문의 역사에 등재된 지식은 대부분 나중에 허위로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내용을 가진 교과서를 가르치거나 배우고 있는 지금의 학교교육은 교육의 역사에서 배제되어야 할까요? 많은 경우에 이들은 이후의 지식의 형성에 장애가 되면서 동시에 발전의 토대를 이루었습니다. 교육을 위한 교과서는 오히려 그런 오류의 계열화를 반영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교육의 소재를 중심으로 교육학이 연구해야할 것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원서에서는 더 많은 시사점이 있지만,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것만 저 백진우가 인위적으로 추린 것입니다. 위에서 소개되었던 과제가 충분히 연구되었을 때, 특정한 수도계를 소재로 하는 교육에만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교육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교육을 인정함과 동시에 소재에 제한받지 않는 교육의 실현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수도계의 존재성에 대한 공감적 확인은 결국 교육의 과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소재의 내용이 결국 교육의 내용을 통해서 점차 밝혀져 나가고 있습니다. 수도계의 내용은 교육에 의해서 밝혀져 왔고, 또 앞으로도 확인하고 입증해야 할 사항입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우리는 수도계의 총체적인 내용은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해하고 입증하는 확실한 방법적 도구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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