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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가치와 소재 1 ㅣ 교육의 가치

*본 기사는 "교육의 재정의" 시리즈의 11번째 컨텐츠입니다. <클릭>해서 처음부터 보시는 것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어려운 단어가 있나요? 용어사전을 활용해보세요.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가치부재, 방향감각의 상실, 아노미 혹은 가치혼란의 실상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생활조건은 예전보다 상당히 풍부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불만과 공허함이 가득합니다. 그 동안 무수하게 거론되어 왔던 ‘교육개혁’에서 표방하는 개혁의 방향은 많은 경우 교육의 수단적인 가치, 특히 세속계적인 가치가 지배적으로 작용했습니다. 혹시 그것 자체의 잘못은 없을까요? 인간의 가치는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개발되고 깨닫게 되어야 할 성질의 것인데, 혹시 우리는 단지 언어로 모방하거나 결과상으로 강요하는 식의 교육을 하고 있지는 않나요?

하나의 사건은 그것을 평가하는 기준의 선택에 따라 가치 있거나 무가치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가치의 실현이라고 해도 우리가 처한 세계와 입장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지기 때문에 가치변별이 중요한 과제로 등장합니다. 가치관은 상호 충돌과 시험을 거쳐 정립되어 왔습니다. 우리의 오랜 경험을 통해서 금의 가치는 무게로, 그리고 전등의 가치는 밝기로 평가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세계는 그 분야에 맞는 기준이 적용될 때, 정당하게 평가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정치계는 정치적 가치에 의해서 평가하고, 경제계는 경제적 가치에 의해서 평가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진 정치계와 경제계를 어느 한쪽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세계의 특수성을 무시하는 처사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치나 경제라는 세속계적인 기능에 비추어 수도계를 평가하는 것도 수도계의 자율성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가치의 혼란과 도착의 문제를 해결하는 강력한 가치범주의 하나가 내재적 가치와 외재적 가치의 구분입니다. 우리가 내재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그것으로 인한 다른 보상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자체의 내적 풍요로움과 보람을 느끼기 위한 것입니다. 등산가에게 “에베레스트산에 올라가면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보면 그는 “그것은 위대한 도전입니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여타의 고초를 감수하려는 이런 대답에는 등산 자체의 내재적 가치에 대한 단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 등산은 내재적 가치가 있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등산가를 수행하는 한 사람은 “그것은 생계유지에 퍽 도움이 됩니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의 경우는 등산의 가치를 외재적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구분은 교육의 목표와 가치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입니다. 내재적 가치의 기준에 비추어 본다면, 이론상 교육은 그 자체로서 그것에 참여할 가치를 가지고 있는 세계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여타의 세계의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으로서의 가치, 즉 외재적 가치도 가질 것입니다. 교육의 가치는 이 두 가지 가치의 합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는 교육의 내재적 가치에 대한 충분한 탐색을 하지 않고, 기능주의적 시각에서 오직 여타의 외재적 가치만을 과장함으로써 자체의 내실을 꾀하지 못한 채 그것의 역량 밖의 것에 대하여 무한의 책임을 지는 경향을 보여 왔습니다. 중요한 교육계획이 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발전을 위한 교육”이라는 도식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교육은 고유의 가치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일까요?

사람들은 교육이 그것 이외의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는 관점에 젖어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교육을 학교생활과 연관시키는 잘못된 관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국가는 다른 분야의 수단이라는 관점에서 학교를 지원해왔고, 개인은 지위나 보수와 같은 외재적 보상을 위해 학교에 다닙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나 혹은 우리 생활의 곳곳을 면밀하게 검토하면, 무보수 혹은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교육에 종사하는 특수한 사례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례들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 수도계에서는 모든 영광이 그것의 최정상의 품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지만, 교육에서는 낮은 품위가 더 높은 품위를 생산해내는 토대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음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오히려 교육에서는 품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개선하는 교육에 성실하게 종사하는 것을 더 높이 평가합니다. 이 점에서 원칙상 교육의 내재적 가치는 그것이 소재로 삼은 수도계의 가치와는 독립적입니다. 하지만 수도계와 교육계 각각의 가치는 서로 미묘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도계적 가치의 입증은 철학적 분석이나 논리적인 정당화 이상을 요구합니다. 남이 가치 있다고 인정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 가치를 수용하는 것은 수도계적인 가치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치체험이 동반되지 않는 가치언어는 생명 없는 문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치의 판단은 그 판단을 할 만한 체험과 자격이 전제됩니다. 이런 전제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공리공론에 빠질 것입니다. 가치의 실재성은 그것을 실현시키는 과정에서만 입증됩니다. 그렇다면, 가치를 감식하는 능력은 어떻게 형성되며 그것들이 수준상의 차이를 극복하면서 보편성을 갖게 되는 과정은 어떤 것일까요?

여기에 항상 문제로 등장하는 것이 이른바 “무엇이든 옳다”는 식의 상대주의나 “무엇이든 틀리다”는 식의 회의주의입니다. 이제까지 수도계적 가치논의에서 특정 가치의 보편성만이 강조되었다면, 차츰 가치판단의 주체, 즉 누구의 가치냐 하는 문제가 존중되며 이른바 ‘상대성’의 문제가 등장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어떤 수도계에 있어서 상대적인 품위를 가지고 있으며, 불가피하게 수도계를 자신의 품위로 체험하고, 그것에 비추어 행위를 감별하며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가치판단자의 입장에서는 그가 가진 품위가 최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각 수도계상의 위계에 있어 다른 위치에 처해 있고 각자가 최선이라고 생각하기에 누가 진정한 의미에서 최선인지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교육에 대한 고민은 이런 피상적인 상대주의에 대해 보다 분별 있는 논의를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교육은 애초부터 수도계의 가치판단에 있어서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전제합니다. 하나는 특정한 품위를 기준으로 내리는 판단의 기준이며, 다른 하나는 가치의 상이한 위계를 체험함으로써 얻는 가치지향입니다. 수도계는 완성을 향하지만 완성의 상태에 도달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교육은 그 위계를 체험의 축으로 통과하면서 그것을 극복합니다. 즉 부동의 이상향은 비교육적입니다. 교육은 인간의 영혼을 구속하는 일차원적인 가치작용을 유보시키고, 그것을 초월하거나 그 초월을 돕는 임무를 띠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 수도계의 가치추구적 측면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교육의 가치는 우리가 아직 알 수 없는 다른 무수한 세계들에게 모종의 수단적 가치들을 가질 것입니다. 모든 것들을 망라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은 그 의도와는 다른 겨로가상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비단 긍정적인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교육학이 가치의 모든 것들을 탐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육 속에 침투해 들어오는 정체불명의 각종세계의 가치들과 이데올로기들이 면밀하게 검토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어떤 것을 대표하며, 어떤 통로로 교육과 관련되나요? 일렇게 꼼꼼하게 따지며 정립된 주체적 가치관은 그러지 않음으로써 비롯된 오늘날의 혼미한 교육의 현실을 정도에 오르게 하는 지침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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