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적 세계와 교육 5 ㅣ 본위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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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우리는 우리생활에서 혼성되어 있는 다종의 세계를 구분한 바 있는 데 그 세계와 인간 간에는 어떤 관계를 갖게 되는지, 어떤 것을 위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한 구체적인 개인을 두고 볼 때, 우리는 앞서 제시된 각각의 세계와 관련하여 어느 세계에만 속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소간 세속계와 관련해 일상적인 의무를 다하고, 수도계와 관련해 해당 품위만큼 세계체험을 하며, 교육계와 관련해 열심히 상구하고 하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개인을 대상으로 해서 사람을 이 세계의 어느 하나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하는 방식은 그렇게 적절한 것이 못됩니다. 대신 우리는 이론적으로 세속인, 수도인, 교육인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구체적인 개인을 의식해서보다는 그 개인 내부 가운데 그가 관련을 맺고 있는 제반 이종의 세계와 관련해 구분하는 방식입니다.
경제활동이든 학문이든 교육이든 그것은 모든 인간들이 다소간 하고 있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혹시라도 어떤 전문적인 분업을 연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은 걸핏하면 사람들을 직업에 따라 갈라놓는 편법을 동원합니다. 이런 방식은 인간생활의 다양성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특정 자연인들에게 지나치게 특수한 활동에 대해서 독점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오류를 낳습니다. 이런 방식의 구분은 여타의 우리 모두를 다양한 삶으로서의 참여를 방해할 우려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통째로 경제활동만을 하거나 학문적인 활동만을 하거나 교육적인 활동만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컨대, 어떤 특정한 자연인 A,B,C 등을 놓고 경제인과 비경제인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학자와 학자 아닌 자연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육자와 비교육자가 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경제인, 학자, 교육자는 자연인의 한 가지 특정한 생활양식을 지칭합니다.,
한 자연인 안에는 경제적인 삶과 비경제적인 삶, 학문적인 삶과 비학문적인 삶, 교육적인 삶과 비교육적인 삶이 공존하며 전자를 우리가 생생하게 체험하는 "순간"만큼 우리는 그를 경제, 학문, 혹은 교육의 세계에 종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정한 자연인과 그에게 부여되는 경제인, 학자, 혹은 교육자를 이와 같이 구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선 이 구분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명분상의 경제인, 학자, 교육자들을 우리의 고려에서 배제할 수 있게 해줍니다. 경제와 학문과 교육에는 어떤 특권적인 지위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경제인, 학자, 교육자는 오직 자연인의 다양한 면모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삶에서 경제활동, 학문활동, 혹은 교육활동에 얼마나 충실하게 종사하느냐의 여부에 의해서 그 실질적인 의미를 보장받는 칭호입니다.
각 세계는 그 세계 나름의 고유한 가치와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그 다양한 가치에 의해서 "잘 산다"는 의미규정을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생활에서 접하는 다종의 세계를 하나의 위계로 평정하여 하나가 다른 것보다 낮다거나 열등하다고 보아서도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우리생활에서 서로 다른 기준에 의해서 평가받아야할 국면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으로 잘 사는 삶의 양태와 수도계적으로 잘 사는 삶의 양태는 다릅니다. 그런데 예컨대, 세속적인 가치기준으로 수도인을 평가한다거나 수도계적인 가치를 가지고 세속인을 평가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이것은 마치 금을 광택에 비추어 평가하고, 전등을 무게에 비추어 평가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가치를 공립시킴으로써 삶의 다채로움을 만끽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 교육적인 삶도 세속계와 수도계에서 얻을 수 없는 고유한 보람을 우리에게 안겨준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전체적인 생활에서 우리가 모든 가치를 골고루 실현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두 손을 들어 환영할 일입니다.
모든 것을 공립시킬 수 있다면 생활의 갈등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개인생활에서 모든 가치를 병립시켜 실현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 흔히 봉착하는 고민은 사람들이 여러가지의 일을 동시에 잘 해나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쫒을 수 없습니다. 가령 정치와 학문은 각각 매력 있는 세계이지만 그것들을 동시에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극히 힘에 부치는 일입니다. 우리는 장기적이든 단기적이든 어떤 세계에 종사하기를 선택해야 하고, 일단 그 세계가 선택되었으면 그와 유관한 삶의 자세를 취하고 나머지의 것은 배제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한 가지 세계와 관련을 맺기 위해서 두 가지 마음을 품지 않고 전심전력하는 방식입니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것은 부차적인 위치에 머뭅니다. 이 때 우리의 일상생활은 공정하다거나 중용적인 것을 벗어납니다. 우리가 어떤 세계 하나를 선택하고 그것을 위주로 생활하기 시작하자마자 우리의 생활과 판단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왜곡되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점을 고려하면 우리의 생활에서 세속계, 수도계, 교육계 중의 어느 것에 주된 의미를 부여할지를 결정하는 일이 누구에게나 중요한 과제로 남습니다. 이들은 서로 독특한 삶의 형식과 무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의 세계에서 다른 활동과 체험을 하게 되며, 따라서 우리는 그 이질의 세계에 참여할 때 그에 알맞는 태도전환을 요구받습니다.
이들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실재적이라거나 비실재적이라고 속단하기도 어렵습니다. "실재"라는 말은 우리가 생활하는 가운데 그때그때 어느 세계를 위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이 앞서 다원주의적인 세계론자들의 논의를 통해 지적되었습니다. 세속계가 실재적이고 수도계는 비실재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실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 말하는 사람이 세속계적인 것을 위주로 생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속계보다는 수도계를 중시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수도계를 세속계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느낄 수도 있습니다. 실재라는 말 대신 "더 의미가 있다"라거나 "더 참되다"라는 말을 써도 우리의 논의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학문이라는 것도 이런 다종의 세계의 어떤 것들입니다. 학문생활이란 수도계적 생활의 하나이며, 더 나아가 다른 여타의 수도계적인 생활과는 달리 특별히 학문에서 요구하는 활동과 태도의 전환에 의해서 체험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그 태도전환이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면 학문은 그 만큼 그에게 그것을 실재로서 느끼기 어려운 세계일 수도 있습니다. 십인십색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소질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학문의 세계를 다른 여타의 세계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느끼며 거기에서 요구하는 활동에서 남다른 삶의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이 경우 그는 천부적으로 학문의 적성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이상적인 사람을 논의의 편의상 전형적인 학자 혹은 약칭하여 "학자"라는 칭호로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이는 학자라는 사람들이 따로 있다는 식의 관행과 다른 방편이라는 사실을 항상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생활세계 속에 잠복된 하위세계들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구분하든 간에 각각의 세계는 그것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 접근 방법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하나는 내재적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외재적 시각입니다. 내재적 시각은 그 세계에 대한 해석의 기점을 그 세계의 구조에 둡니다. 이와는 반대로 외재적 시각에서는 그 세계내의 모든 것이 그 세계 밖의 제반 특성에 비추어 혹은 그들과 관련 하에서 해석됩니다.
이런 양면의 대비는 가치의 측면에서도 이루어집니다. 각각의 세계는 내재적 가치와 외재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 중 다양한 가치에 의해서 평가될 수 있습니다. 외재적 가치는 그 세계 여타의 세계의 수단이 되는 제반 가치들을 총칭한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내재적 가치는 오직 그 자체의 세계에 종사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기는 가치입니다. 이 중 외재적 가치는 그 세계 밖의 여타의 세계에 의해서 달성될 수 있음에 비해서 내재적 가치는 오직 그 세계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세계의 입장에서 볼 때 가치의 다양화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예컨대, 학문계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능 등 다양한 기능을 할 수 있지만 그 다른 목적들은 정치계, 경제계, 사회계에 의해서 달성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탐구라는 가치는 오직 학문계 내부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방식은 각각 그 장단점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하나의 특정한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 내재적인 관점이 외재적 관점에 비해서 우선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하나의 세계에 대한 울타리는 전자에 의해서 구획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세계의 구조가 결정되고 난 후에야 혹은 그것이 전제될 수 있는 조건 위에서 그것과 다른 것들과의 관계가 설정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다원주의적 세계관의 지지자들은 그 내재적 관점의 확보에 필요한 절차와 규칙을 강조하여 왔습니다. 예컨대, 슈츠는 이와 관련해 "실재의 악센트"라는 말을 적용합니다. 어떤 한정되고 특수한 세계에 진입할 때 우리는 그 특수한 세계내의 유관한 사항을 택하고 여타의 것은 무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오우크쇼트는 앞서 지적했듯이 "논점상위의 오류"를 중시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경험의 양식들 가운데 하나는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을 정도로 구조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 중 하나의 특징을 말함에 있어서 다른 것을 개입시키는 것은 오류에 속하는 것입니다.
장상호는 이런 문제와 결부하여 본위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여기에 두 길, A와 B가 교차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이 때 그곳은 A인가요, 혹은 B인가요? 이에 대한 해답은 경우에 따라 다릅니다. 그 경우란 우리의 실재에 대한 악센트가 어디에 주어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관심이나 논의가 A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다면 그 곳은 A에 속할 것이고 반대로 B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다면 그 곳은 B에 속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구체적인 사건, 사물, 인간, 활동 등은 다양한 세계의 교차 영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중 어느 것을 본위로 하느냐에 따라서 매번 그들의 어떤 것들이 전경으로 부각되며 나머지는 배경으로 후퇴합니다.
이런 본위의 원칙은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어떤 자연인을 두고 개념적으로 어떤 특정한 측면만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속인, 수도인, 혹은 교육인이 바로 그런 범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우리는 이런 범주의 어느 하나가 어떤 특정한 자연인에게 독점적으로 혹은 전면적인 것으로 쓰이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 분류는 우리가 삶을 영위하여 가는 가운데 역동적으로 작용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제반 복합적인 삶의 현장에서 무엇을 본위로 하며 생활하느냐에 의해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는 세속적인 양태에 있다가 다른 때, 다른 곳에서는 수도인의 양태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세계를 그 때, 그 장소에서 본위화하느냐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 모두의 범주에 듭니다. 그러나 생활의 맥락에 따라 그 본위를 선택하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개인과 개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갑”과 “을”은 그들이 본위화하는 세계에 따라 그때 그때 세속적인 관계, 수도계적인 관계, 그리고 교육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각종의 세계 가운데 어떤 하나를 선택하고 그 곳의 생활에 전력을 투입하려고 하는 경우 우리는 반드시 본위의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논의를 단순화시키기 위해서 학문계에서의 과학과 교육계에서의 하화와 세속계에서의 경제가 서로 중첩되는 생활세계를 가정해봅시다. 각 세계는 다소의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지고 자체의 기능과 목적을 수행하면서 그 특성으로서 타세계와 상호작용하고 있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그들이 총체적으로 균형을 이루면서 그들이 서로 상보적으로 공생하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삶을 영위하면서 부단히 상구하고 그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런 조화의 묘미를 살리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질적인 세계들은 경우에 따라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그 중 어떤 것을 선택하고 그것에 차별적인 관심을 두고 생활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의 예에서 과학, 하화, 경제 가운데 어느 축을 선택하느냐에 ᄄᆞ라 우리의 그들에 대한 규정방식 자체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내계와 외계, 전경과 배경, 내재성과 외재성, 일차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 목적과 수단, 본질과 비본질, 유관과 무관, 기능과 비기능, 실재와 환상이라는 말이 적용되는 범주상의 급격한 형태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것에 준하여 우리의 생활태도의 전면적인 전환이 필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선택된 세계에 종사할 때 이런 본위화를 소홀히 한다면, 엄청난 혼동과 혼미, 가치전도, 혹은 착각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영상 시리즈의 본위는 무엇일까요? 이제 그것을 밝힐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세계의 존재를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고려에 넣고 논의를 전개할 수는 없습니다. 그 점에서 어떤 논의든간에 본위의 면에서 편파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점에서 다양한 세계들 가운데 학문과 교육이 교차하는 영역을 전면으로 부각시키는 관점을 택하고 있습니다. 여타의 세계 가운데 기본적으로 학문계와 교육계를 본위로 하는 논의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우리가 모종의 선택적인 인식의 태도를 취한 것입니다. 우리는 학문과 교육만이 본질적인 것이고 세속계는 비본질적인 것 혹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우리의 논의를 전개할 것입니다. 또한 수도계 가운데서도 학문이 아닌 것은 무시할 것입니다. 따라서 여타의 세계, 이를 태면, 세속계나 혹은 학문 이외의 수도계를 본위로 하여 생활하는 청자에게는 우리의 논의가 다분히 편협하고 일방적이고 비실재적이고 공리공로넉인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이런 접근방법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우선 장상호의 본위와 청자의 본위간에 차질을 애초부터 예상하고 사전에 양해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학문을 학문답게 혹은 교육을 교육답게 이해하는 데 선결될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접근방법은 특히 교육학을 그것이 이제까지 저질러 온 논점상위의 오류의 수렁에서 구해내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약간 지적한 바 있고 앞으로도 더 강조해서 논의할 문제이지만 교육학은 그 본위의 개념이 결여된 학문분야의 전형이라고 할 만합니다. 현존하는 교육학자들은 교육에 관해서 논의해야 할 자신의 신분을 잊고 철학을 말하고, 심리적 사실을 논하며, 사회적 사실이 존중되어야 하고, 행정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떠들어 댑니다. 이들은 한마디로 교육의 입장에서 외재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논의는 아직 그 내재적 관점의 정립이 선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점을 우리는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장상호는, 그리고 이 영상을 만들고 있는 저 백진우도 우리의 논의가 극히 교육학적이기를 기대합니다. 교육학은 교육을 대상으로 삼는 학문입니다. 그것은 교육과 학문을 두고 볼 때 학문본위의 활동입니다. 그 점에서 우리의 논의는 그 시각과 가치의 면에서 중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 마치 학문계와 교육계만이 의미있는 삶을 약속하는 듯한 논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배타적 입장에서 우리는 새로운 “교육관”을 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의 교육이 학문의 방법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지 다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학문을 위한 교육”과 “교육을 위한 학문” 이 두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할 것입니다. 학문의 입장에서 교육이 부차적인 것일 수도 있고, 그 역도 가능합니다. 이 경우 우리는 전자의 입장과 관점을 가질 것입니다.
*다음 컨텐츠 (교육의 가치와 소재 1 ㅣ 교육의 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