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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적 세계와 교육 4 ㅣ 상구와 하화

*본 기사는 "교육의 재정의" 시리즈의 9번째 컨텐츠입니다. <클릭>해서 처음부터 보시는 것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어려운 단어가 있나요? 용어사전을 활용해보세요.

지난 영상에서 우리는 드디어 교육을 정의내리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한편 이는 장상호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육의 세계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교육은 앞서 신화에서 시사되었듯이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하나는 자신이 위로 향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아래로 향하는 방향입니다. 그 활동의 물리적인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는 상구와 하화라는 새로운 용어를 도입하고자 합니다. 이들은 개인이 수도계의 수직적인 관문이 요구하는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를 가지고 그것을 오르내리게 하는 서로 다른 장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서로 다른 활동의 상호작용은 선진과 후진간의 수도계상의 차이와 모순에 의한 잠재적 단절과 균열을 매개하고 화해시키고 그것을 역이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교육은 이들 상이한 활동 간의 상호작용에서 그 특수한 구조를 형성합니다.

상구란 내가 자신의 변신의 노력에 의해서 자신을 입체화시키고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 있게 되어 감을 입증하는 일련의 활동을 말합니다. 하화란 그 반대편에 서서 그런 경험을 타인에게 재생시키는 내 편의 활동을 말합니다. 이 상구와 하화는 각각 고유한 요소를 가지고 전체를 구성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총체적인 세계를 대표하는 말로서 경우에 따라 "상구계"와 "하화계"라는 말을 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국면은 상호 공조적인 양상을 띠면서 그들의 개별적인 것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전체적인 특성을 출현시킵니다. 그것들을 통칭하여 우리는 "교육계"라고 칭할 수 있게 됩니다.

청자는 이 몇 마디의 교육에 관한 언술에서 교육의 새로운 의미를 충분히 파악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그러나 너무 당황 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의 교육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는 추후 천천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선 이와 같은 특수한 의미의 교육이라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면 그만입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할 점은 교육계가 하나의 구조적 총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육계는 그 요소적 특징과 구조에 의해서 우리가 앞서 지적한 수도계와 구별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편의성 다음 두 가지 특징을 들어 그것이 어떻게 수도계와 구별될 수 있는지를 이해해 보기로 합시다.

수도계와 구분되는 교육계의 첫 번째 특징은 교육계가 똑같은 요소와 구조를 가지고 수도계의 매 품위에서 반복해서 작용한다는 점입니다. 교육의 조건은 특정한 수도계 혹은 특정한 품위와는 별개로 동일합니다. 그것은 품위의 끝에서 다시 시작하면서 영원히 회기합니다. 교육은 그 과정에서 저수준의 품위를 해체시키고 다음의 더 높은 품위를 획득하는 사이에서 반복됩니다. 여기서 시작은 과거로 또는 탈시간화된 회상으로 환원되지 않고 진정한 시작에 따르는 온갖 도전과 불안과 위험과 더불어 다시 시작됩니다. 이 때문에 교육의 시작과 끝은 동일한 것으로서 반복되지만 수도계적으로 볼 때 그 때마다의 품위의 높이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수도계의 최종적인 단계는 없습니다. 교육은 품차의 틈새에서 언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항상 각 개인이 위치하고 있는 중도에서 이루어지며 각 단계마다 반복됩니다. 교육계는 수도계적인 위계와 상관없이 어느 수준에서나 평등한 활동을 허용합니다. 수도계의 어느 수준에서나 우리는 얼마만큼 상구하고, 얼마만큼 하화할 여지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각 개인은 이 각각의 수준에서 자신의 분수와 역량에 맞게 얼마만큼 상구하고 얼마만큼 하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명하면 현명한 만큼 항상 하화에 종사할 수 있고, 어리석으면 어리석은 만큼 상구에 종사할 수 있습니다. 교육계에서의 선진과 후진은 품위의 높낮이에 따른 갈등과 경쟁보다는 서로 하화하고 상구하는 협동을 앞세웁니다. 그것은 그 각각의 수도계에서 저 지고하게 높은 품위에서나 혹은 저 비천하게 낮은 품위에서나 일어납니다. 그 점에서 수도계적인 위계와 교육의 위계는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능력을 시험하는 수도계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인간은 그들의 능력의 차이를 단지 하나의 줄로 새워서 결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앞에는 학문, 예술, 도덕, 유가, 불가, 도가 등 여러갈래의 수도계가 있고 그 갈래마다 서로 상이한 인간의 능력을 계발합니다. "갑"과 "을"은 두 가지 의미에서 각각 선진임과 동시에 후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횡적인 다양성에서 나옵니다. "갑"은 수도계 X에서는 "을"에 비해서 선진이지만, 수도계 Y에서는 후진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특정한 수도계의 수준의 무한성에서 나옵니다. 여기서 선진과 후진은 각각 그 하화함과 상구함의 교육적인 활동을 위해서 교육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수도계와 구분되는 교육계의 두 번째 특징은 교육계는 수도계와는 다른 내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역사상 무수한 종류의 수도계가 계속 더 높은 수준의 품위를 향해 쇄신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수도계의 진보는 이전의 품위를 더 나은 품위로 대치하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오류로 판명된 품위는 더 이상 인정되지 않습니다. 수도계에서는 한명의 선진이 수백의 후진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나머지는 단지 그들을 따르는 미완성품의 것으로 격하됩니다. 즉 수도계는 소수만이 오를 수 있는 가파른 길입니다. 예를 들어 남의 시의 모방을 일삼는 시인은 시인이 아니며, 남의 학설을 소개하는 것만을 능사로 삼는 학자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육계는 최고의 품위, 혹은 완성된 품위를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이르는 매 단계의 과정을 중시합니다. 그것이 창조이건 재창조이건 상관이 없습니다. 어느 수준의 품위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완성된 품위가 있는 곳에는 교육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육계는 불완전한 인간존재를 근거로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수도계에서 이미 오류로 판명된 품위를 그 중요한 자료로서 수용합니다.

교육계는 수도계의 어느 품위에서 그것을 시작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본질적인 문제는 현재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수준에 있느냐에 있지 않고 다만 그것을 버리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느냐에 있습니다. 이 때문에 교육계에서는 수도계에서의 대가와 보통인의 차이가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높은 수준의 품위를 지닌 대가라고 하더라도 단지 거기에 머물러 있다면 그는 교육계에 충실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비록 낮은 품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개선해 나가려는 보통인이 오히려 교육계에서는 더 높이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교육계에서는 과오가 없음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오를 잘 고치는 일에 성실하게 종사하는 것을 더 높이 평가합니다.

이 점에서 원칙상 교육의 위계와 수도계의 위계는 전적으로 그 차원을 달리합니다. 이론적으로 상구의 가치 혹은 하화의 가치는 그것이 이용하고 있는 수도계의 품위와는 상관없이 이론적으로 등가적입니다.그러나 현실적으로 여기에 여러가지 요인이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현실은 다양한 사례를 산출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는 수도계의 높은 품위에서 졸렬한 교육이 일어나고, 반대로 수도계의 낮은 품위에서 더 훌륭한 교육이 일어날 수 있는 사례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교육에는 항상 얼마만큼의 열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정이란 말 그대로 그 자체로서 목적적인 감정입니다. 상구와 하와의 상이한 열정이 상승작용을 하여 "교육열정"을 창출합니다. 수도계에서는 최고의 품위를 가진 사람에게만 최고의 영광이 주어집니다. 이 점에서 귀족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교육계에서는 원칙상 수도계의 어느 품위에서나 같은 정도의 열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육은 평민이나 천민들도 귀족과 똑같은 보람과 가치를 향유할 수 있는 활동이고 게임입니다.

이렇게 교육 자체를 위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입장을 취할 때 수도계는 단지 교육을 위한 수단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수도계는 교육을 위한 "소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모든 수도계가 교육을 위한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수단으로 삼아 우리는 한편에서는 상구계를 추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하화계를 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교육은 그 자체로서 열광하고 그것에 몰입할 수 있는 내재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상구하고 하화할 욕구와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특수한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것만으로도 인간생활은 잠시나마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교육은 수도계의 다양성과 그 수준의 다양성을 향유하면서 존재합니다. 교육은 특정한 수도계의 종류나 품위의 절대적인 수준과 상관없이 품위의 차이가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번창할 수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수도계의 어떤 특정한 품위에 도달하는 것은 교육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육은 그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반면에 수도계는 그 정점에 있는 품위를 가진 자를 왕으로 모십니다. 그 이하의 품위는 이미 시효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갈등 속에서 우리는 수도계적인 입장에서 교육외적인 인간통제의 수단을 쓰는 경우를 봅니다. 그런 시도의 하나가 흔히 종교적인 "교화"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종교는 어떤 절대적 품위에 오른 선진과 상대적 품위를 가진 인간간의 상호작용의 양상으로 나타납니다.여기서 후진의 품위를 일시에 선진의 품위로 바꾸어 놓으려는 관계가 성립됩니다. 한편으로 후진이 선진에 대해서 초인간적인 위력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외포, 신뢰, 충순의 정을 느끼며 희생을 바치고 기원,예배하며 나아가서는 흔히 제사의식을 행하는 의무관념에서 복종,종사하는 생활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선진이 후진에 대해서 그들의 부족함에 대해서 연민,우려,동정,은총,용서의 정을 느껴서 그들의 현실적 것을 훨씬 뛰어넘어 자신의 기적,계시,암시,신비화에 동조하도록 함으로써 그들의 소망을 성취하고 그들의 영혼을 구제하려고 합니다.

이런 인간관계는 교육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입니다. 이른바 세계종교의 종주인 예수, 석가, 공자는 위대한 인간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으로서 우리는 단지 몇 차례의 거듭남으로 그들이 도달한 실재의 세상에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불확실한 세상살이에서 그들의 위대성을 절대시하고 그들의 지침이나 가르침을 무조건 믿어 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란 신이라는 절대적인 존재와 짐승의 중간자에 불과합니다. 그런 한계를 가진 인간이 매사 교육에 의해서 그 한없이 높은 절대적인 실재를 확인하려고 하는 발버둥 자체가 어쩌면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릅니다. 대신 우리는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역사적인 위인들의 경지를 절대시하고 "당신이 내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신다면 내가 당신의 율법으로부터 절대적인 실재를 볼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수도계나 교육계보다는 종교계의 구성원이 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수도계를 교육의 소재로 삼는다는 것은 인간성을 어떤 고정된 수준에 고정시키려는 그 어떤 시도도 반교육적인 것임을 말해줍니다. 성현의 삶은 그 자체로서 매우 고귀한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수준의 표면적 형태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그 높은 수준의 정신과 우리의 낮은 수준의 정신과의 관계입니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결합할 수 있게 하느냐 하는 것이 교육의 과제입니다. 그것은 일시에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면 높은 정신은 낮은 정신으로 침잠해 버리지는 않을까요? 무조건 따르게 하고 따르면 되는 것일까요? 물론 그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기계적인 기능의 모방에 불과하고 오히려 낮은 자의 정신적인 소외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강요되는 수도계의 품위는 그것이 아무리 고귀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교육의 소재의 속성을 잃습니다. 교육은 그 양자의 수준을 도야의 과정을 통해서 매개하고 그 정신의 내재적 가치를 심열성복적으로 정당화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상구는 주체가 미지의 새로운 품위를 자신에게 실현시키고 그것의 가치를 주체적으로 확인하고, 하화는 자신이 거쳐 온 기지의 품위를 타인에게 실현시켜서 그것의 가치를 보편적인 것으로 확인시킵니다. 그 높은 수준의 정신을 소유한 사람과 낮은 수준의 사람은 그들 간의 간격을 일시에 메우려고 하지 않고 서로가 그것에 이르는 도야의 과정을 반복하도록 하고 그것을 반복함으로써 비로소 서로 만납니다. 실상 인류의 스승이라고 불리는 역사적 인물들은 모두 이 점을 존중했습니다. 예수는 신적인 존재이지만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나타나 구원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각 단계에 알맞은 교육을 강조했다는 사실은 앞서 지적했습니다. 석가의 대기설법(對機說法 상대편(相對便)이 이해(理解)할 수 있도록 자질(資質)에 맞추어 하는 설법(說法))이나 공자의 수인이교(隨人異敎사람에 따라 가르침이 다르다)도 스승은 상구자의 품위에 따라 항상 자신의 용모를 자유자재로 변심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그 중 어떤 것들이 후대에 사람들이 절대적인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종교적인 것으로 변질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끝없는 반복을 통해 비로소 낮은 수준의 사람은 높은 수준의 정신의 가치를 직접적인 확인을 가지고 본래의 성질로 가치 있게 사유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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