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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적 세계와 교육 3 ㅣ 교육의 정의

*본 기사는 "교육의 재정의" 시리즈의 8번째 컨텐츠입니다. <클릭>해서 처음부터 보시는 것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어려운 단어가 있나요? 용어사전을 활용해보세요.

우리는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세속계, 수도계, 학문계 등과 같은 다양한 이종의 세계를 보았습니다. 이제는 이러한 허다한 세계 중 교육계가 어떤 것이냐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이제까지 무수한 “교육관”이 있고 이들 간에는 거의 소통할 수 없을 정도의 의미상 단절과 간극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입장을 택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택할 입장의 주된 윤곽은 첫째, 교육을 일상적 인식의 세계의 하나인 “학교”와 이론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이고, 둘째, 학문의 자율성을 갖는 방식으로 교육을 정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육은 학교라는 제도가 이 세상에 출현하기 이전부터 교육이 실재했으며, 지금도 교육은 학교라는 울타리에 제한받지 않고 진행되고 있다고 봅니다. 또한 교육은 고유한 자율적인 구조와 특성을 가지고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교육학은 그 자체의 특징있는 구조에 적절한 그 자체의 특징있는 범주를 가진 자율적인 학문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교육학이 말하는 교육의 실재와 일상적 의미의 교육과는 일치할 수 없습니다. 만약 여기에 일치가 이루어 진다면 교육학이 별도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사용하고자 하는 교육이라는 말이 우리의 생활에서 전혀 이질적인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친근하지 않은 것은 교육이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포착할 수 있는 개념적 체계입니다. 즉 교육이 아니라 교육학이 문제가 됩니다. 오히려 알고보면 우리가 지칭하고자 하는 교육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너무도 친근하게 체험하고 있는 세계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동서고금을 통해서 동일한 구조로 보편적으로 존재해왔으나 다만 그것을 아직 개념적으로 포착하는 일을 소홀히 한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기존의 교육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버리고 그 교육 자체에 대한 체험적 근거에 호소한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더욱 공감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이제 우리가 검토할 교육계는 앞서 든 세속계나 수도계와는 다른 하나의 자기충족적 세계로서 총체적인 생활세계 안에서 이들과 모종의 관련성을 가지고 존재합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말한다면 교육은 각종 수도계를 “배우고 가르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식의 방식으로서 그 상식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교육의 더 깊은 실재에 관해서는 좀더 세련된 안목과 용어를 동원하여 논의되어야 하고, 그것이 교육학의 항존적인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출발점이 될만한 교육의 내재적인 속성을 개념화하고 그것을 학문과 연관지우는 방식을 취할 것입니다. 학문적 사실은 일상적 경험에서 형성된 일상적 언어로 표현될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교육학은 그 나름의 개념과 언어를 만들지 않았으며, 그 대신 일상어와 타학문의 언어를 써서 교육을 기술해 왔습니다. 우리는 일면 일상어를 쓰고 타면에서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고자 합니다.

지구상의 생물은 그들이 가진 유전적인 소질과 능력과 더불어 그것을 신장시키는 그들 나름의 발전의 기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건화, 모방, 세뇌, 교조화, 사회화 등 그 항목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이들은 각각 상이한 특징과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인간은 교육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린 유아에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으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지를 간략하게 그 윤곽을 파악하는 정도에서 이해해 보기로 합시다.

인간은 본질상 활동적이며 생산적인 존재입니다. 그 생산에는 모든 인간적인 산물이 포함되지만 그 가운데 가장 특수하고 중요한 부분은 인간성 자체입니다. 인간은 “아직 그 본질이 결정되지 않은 동물”입니다. 그가 무엇이 될 것인지는 그의 역사적 결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 본질을 그것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경험합니다. 즉 인간의 자기이해는 생래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의 소산입니다.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건 변전합니다. 그것은 강요된 것일 수도 있고 선택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인간성을 창조함에 있어서 스스로 “소외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점이 우리가 모색하고자 하는 교육의 일차적인 특징이며 조건입니다.

교육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자신을 변형시켜나가는 과정에 참여하는 세계입니다. 인간은 과거를 건너서 미래의 잠재적인 가능성과 더불어 실존합니다. 인간은 과거의 사건들이라는 개인적인 역사로부터 한발 벗어난 현재에서 열려있는 미래를 눈앞에 놓고 계획합니다. 교육은 인간이 자신의 책임하에 그런 내재적 가치가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개개인이 주체적으로 실현시키고 확인하는 실천의 구조를 가진 자율적인 세계입니다.

부족하지만 이 정도의 이해를 토대로 교육계와 여타의 세계를 구분해보기로 합니다. 먼저 교육계와 세속계를 구분하고 관계지우는 양태는 수도계와 세속계가 구분되는 양태와 같은 차원에서 거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속계 내에서 다양한 인간성의 변화가 있고 그 중에는 “사회화”라는 과정이 있습니다. 사회화란 특정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 사회의 특성을 내면화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것의 목적은 다분히 세속계의 발전과 유지에 있으며, 반드시 인간성 자체의 주체적인 참여와는 일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적인 사회화가 실패한 교육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역사상 허다합니다. 이 점에서 세속계와 교육계간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그들간에는 다른 여타의 세계들간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모종의 우연적인 관계가 있을 뿐입니다.

유교무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는 뜻으로, 세속계적인 범주와 교육의 범주가 무관함을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육이 세속계에서 중시하는 인종, 부귀와 빈천, 계급, 나이, 성별의 구분이 없이 이루어질 수 있고 이루어져야 함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 세속계적인 범주들은 실생활에서 교육과 모종의 우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교육의 본질적인 사항을 구성하지는 못합니다. 교육계에서는 세속계의 유지와 발전보다는 인간성의 진화적 참여라는 차원이 더 중요한 과제로 등장합니다. 이 점에서 교육은 수도계와 더 긴밀한 관련을 갖습니다. 이제 우리가 더 검토해야 할 대목은 교육계와 수도계간의 차이와 관계양상입니다. 한마디로 교육계는 수도계의 존재를 전제하고 존립하지만 그 구조와 목적의 면에서 서로 혼동되어서는 안될 별개의 세계로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재정의하려는 교육은 수도계와 공존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존과 동일성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교육은 수도계와 공존하지만 그것은 수도계와 전혀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는 실재입니다. 수도계에서는 그 구성원이 인간으로서 우리들 자신의 인간성을 실험하고 그 바람직성을 서로 간에 확인하는 데 공동의 목표를 둡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인간성 자체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계는 그것이 개인에게 소유되지 않는 한 그 개인에게는 “소외된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에서는 아직 그 가능성으로 남아있는 인간의 본질을 탐색하고 그 산물에 대해서 서로가 만족합니다. 교육은 이처럼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데 우리 각자가 주체적인 참여를 하는 세계입니다.

하나의 독특한 세계로서 교육이 무엇일지를 일거에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더욱 손쉬운 이해를 돕기 위해서 장상호는 그 역사가 오래고 또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하나의 전형적인 신화에 비추어보자 합니다. 그 다음에 그 신화적 비유에 좀더 전문적인 개념과 용어를 첨가하여 그 실상을 파악하는 방편을 써 보기로 합시다. 장상호가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신화는 구체적으로 말해서 플라톤의 <국가론>의 제 7편 첫머리에 나오는 동굴의 신화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그의 그라우콘과의 대화한 내용을 플라톤에게 전하는 방식으로 소개되는 이 신화는 놀랍게도 그 구조의 면에서 우리가 본 영상에서 택하려는 교육관과 그 구조와 내용의 면에서 너무도 유사합니다.

비유 속 세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동굴 안에는 입구 쪽으로 등을 돌리고 한쪽 방향만 볼 수 있도록 머리를 고정시켜 묶은 죄수들이 있습니다. 이때 죄수는 등 뒤에 있는 불빛에 의하여 앞면 벽에 비치는 사람이나 동물의 그림자를 실재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심지어 동굴 밖 세상을 보고 그것이 실제가 아님을 알리려 되돌아온 사람에게 동굴 속 사람들은 콧웃음을 치며 오히려 박해를 가합니다.

이 동굴의 신화는 어두운 동굴과 그 동굴 밖의 세계로 연결짖는 길을 통해 우리가 말하는 수도계와 교육계간의 교차점을 매우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것은 하나의 길로 통하는 초월적인 세계로서 수도계라는 것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의 세계, 선을 추구하는 도덕의 세계, 혹은 미를 추구하는 예술의 세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신화는 수도계를 오르내리는 사람들과 활동을 매우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동굴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은 그림자를 보고 진실이라고 생각하며, 동굴 밖의 사람은 그것이 허위임을 압니다. 여기에 위치상의 수직적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신화의 강렬한 이미지는 그 수도계적인 위계상의 차이보다는 그 차이를 인식하게 되는 주인공의 독특한 활동에 있습니다. 알다싶이 여기에는 두 가지 과정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동굴 안에 같혀 있던 사람이 그곳에서 풀려나서 동굴 밖을 향해 나가는 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동굴 밖에서 그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활동입니다. 이들은 모두 독특한 문제상황이며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 역시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두의 활동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위로 오르는 길은 거칠고 험악했습니다. 동굴 입구에서 비치는 불빛 자체가 눈을 아프게 했습니다. 되돌아오는 길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어둠에의 적응은 밝음에의 적응만큼 어렵고 괴로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림자를 진리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그 생각이 편안하기 때문에 내려오는 자의 의도에 순탄하게 응하지 않습니다. 사슬에 묶이어 그 곳에 머무르고 있고 사람들은 위로 올라갔다가 눈을 망치고 돌아왔다고 지탄하면서 오히려 자신들을 돕고자 하는 선의의 하강자를 죽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신화의 주인공은 왜 그런 어려운 일을 할까요? 이런 활동은 명예를 얻고 권세를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인간된 영혼의 열망에 부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오름과 내림의 활동의 경우는 어떨까요? 소크라테스는 그 오름을 배움으로 보고 배움은 노는 것같이 즐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내림을 가르침으로 보고 가르침은 역시 강제적이나 외부적인 보상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활동의 순수한 가치는 대개 그로 인한 희생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소크라테스의 삶 자체가 그것을 입증합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가르침이 생명보다 더 소중했던 것은 그의 죽음이 입증합니다. 그만큼 가르침은 배움 못지 않게 비강제적이고 자발적인 활동인 것입니다.

동굴의 밑바닥에서 동굴 밖에까지 이르는 과정에는 몇가지 수준의 차이가 있는 단계를 거칩니다. 그것은 플라톤의 개념을 빌리더라도 예컨대 억견과 지식의 단계가 있고, 그 각각의 단계는 다시 영상, 신념, 그리고 오성과 지성 등의 하위수준의 위계를 갖습니다. (영상 -> 신념 -> 오성 -> 지성) 소크라테스가 오름의 단계를 정하고 그 각각의 단계는 그 수준에 맞는 진실성이 있다고 인정하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인간은 순식간에 수많은 단계를 뛰어 오를 수는 없습니다. 역시 그 위계의 차례에 따라 수십년의 장기간에 걸쳐서 단계별로 발전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현재 처하고 있는 단계를 무시하고 어떤 특정한 수중에까지 올려 놓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못됩니다. 소크라테스는 가르치려고 할 때 배우고자 하는 자의 소질에 맞춰서 “놀리면서 키우는 방식”을 추천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사람은 어떤 공부에서건 노예의 상태에서 배워서는 안되기 때문이여, 강제적인 공부는 아무 것도 그 안에 남질 않기 때문입니다.

위의 신화는 그 구조면에서 우리가 택하고자 하는 교육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장상호는 이런 교육에 대한 원형적인 밑그림 위에 새로운 용어를 덧칠하면서 교육의 이론적인 맥락을 구축하는 방식을 취하고자 합니다. 우선 당신은 이 신화가 우리가 앞서 밝힌 수도계의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을 것으로 봅니다. 동굴속의 주인공은 협소한 의미의 세속적인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자기 본질의 최정상을 실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사다리와 같은 단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수도계를 단계적 계기로 경험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품위라는 말로 부를 것입니다.

품위는 수도계의 수준을 인간적인 측면으로 나타낸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무수한 종류의 수도계가 무수한 수준의 품위를 갖는 것으로 가정됩니다. 품위는 체험구조로 되어 있으며, 그 수준에 따라 수도계를 감별하고 평가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사람들은 각 수도계의 어느 품위에 정치시킬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오직 상대적인 지위가 있을 뿐입니다. 수도계 X에서 수준 x1, x2, x3, ... xn가 있으며, 각각은 그 이전의 것에 비하면 높고 그 이후의 것에 비하면 낮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그 수도계의 발전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위계의 어떤 것을 차지하되 그것이 완료된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품위에 따라 선진과 후진의 구분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높은 품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앞에는 또 한번 진입을 시도할 높은 품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에서 수많은 수도계가 개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진리스럽고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의 진입을 허용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곧바로 나의 것으로 소유될 수는 없습니다. 그 점에서 제반 객관적인 수도계는 우리들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내부의 가치를 실현하는 기반은 지금의 경험적 상태를 넘어서는 정신적 성숙을 요구합니다. 만약 그런 정신적인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그 전통의 큰 부분이 단지 그에게 있어서는 단지 물질의 형태로서 방치되어 있습니다. 또한 아무도 이를 소유하지 않으려 하고 그 물질적인 것이 담고 있는 정신적인 내용은 소실되고 말 것입니다.

그 모든 수도계와 품위 규정은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내려지고 있으며, 이들은 개인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적인 것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그 진지함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나의 수준에서 수도계가 진실된 것이 당신에게도 진실한 것이라면 그것은 그만큼 사적인 단계를 넘어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단지 방관자로서가 아니라 해당하는 수도계의 보편성에 직접 참여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충분히 실현되지 못한 채 우리 내부에 잠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수도계를 나와 우리의 것으로 체험하고 공헌할 수 있으려면 그 세계와의 상호관계에서 자신의 내면을 정열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에 종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재구성의 비법을 갖춘 세계가 곧 교육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바람직한 수도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수도계에 대한 체험은 현재 우리가 가진 품위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각 개인은 경험한 수준에서 그 수도계를 대면하고 규정합니다. 수도계의 수준은 결국 그것이 발전하는 가운데 달리 드러나는 측면이기 때문에 속성상 서로간에 모순과 갈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품위가 다른 선진과 후진은 자신의 품위를 논리적으로 전달할 수 없습니다. 교육은 수도계의 생산과정에서 생성된 품위의 차이와 부재에서 비롯된 모순의 틈새와 공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교육계는 한 마디로 각각의 품위를 연결짓는 과정적 실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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