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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적 세계와 교육 2-1 ㅣ 수도계와 학문계

*본 기사는 "교육의 재정의" 시리즈의 7번째 컨텐츠입니다. <클릭>해서 처음부터 보시는 것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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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세속계와 수도계에 대해서 이야기해왔습니다. 혹자는 그럼 학문과 수도계는 무슨 차이일까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학문의 경우는 이처럼 허다한 수도계의 종류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는 특수한 세계로 볼 수 있습니다. "학문"이라는 말은 서양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고 동양의 오랜 전통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 원래의 의미를 따진다면, 그것은 학습과 연구를 통칭하고나 혹은 커다란 깨달음에 이르는 구도의 과정을 뜻합니다. 그것은 천하만사의 근본이치와 삶의 바른 도리를 논구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전통적 의미에서 이런 학문의 의미는 우리의 수도계 전반에까지 확장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전통은 우리가 앞으로 주체적으로 더 발전시키고 계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크고 넓은 과제이기 때문에 섣부르게 다룰 주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학문을 이 영상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영상에서 다루고자 하는 학문은 구체적으로 서양의 희랍에서 발원하여 오늘날 전세계로 전파되고 발전된 "science"혹은 "Wissenschaf"의 말로 대표되는 세계를 말합니다. 여기서 용어상의 혼돈과 혼란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 혼돈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동양의 학문을 구학문, 서양의 학문을 신학문이라 칭할 것입니다. 우리는 정확하게 말한다면 신학문에 대해 한정되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것은 그 중요성에 있어서 서양의 학문이 동양의 학문보다 더 좋다거나 중요하다는 가치관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치 동양의 학문과 서양의 학문을 새것과 옛날의 것으로 양단하여 마치 전자가 후자로 대치되어야 한다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동양의 학문은 그나름으로 발전시켜서 단지 동양에 한정되지 않는 범위로 그 보편성을 인정받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주제는 장상호의 능력과 그의 책의 범위를 훨씬 넘습니다.

학문의 세계는 제반세계를 적은 개념으로 요약해 간결하게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 주된 목적은 세계를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사색의 수준에서 가능한 한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목표는 일단 여타의 세계적 태도, 특히 대상세계적 이해관계로 부터 초연한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상식이 지배되는 일상적 세계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생활에 유용한 도구를 생산하는 일의 세계인 것도 아닙니다. 그것에 참여하는 학자는 물론 인간으로서 그의 동료와 더불어 세속적인 삶을 영위하지만 적어도 그가 학문의 세계에 몰입할 때에는, 즉 학문계에 내주할 때에는 그 일상적 세계의 지배에 흥미를 느끼기 보다는 그것을 이해하는 데 관심을 가진 이론적 사색가입니다. 세속계와 학문계간 개재하는 그런 분명한 세계전환의 태도를 갖추지 않고 학문계에 진입하기는 어렵습니다.

다원적 실재 혹은 복수의 세계라는 개념을 쓴 슈츠는 우리가 말하는 학문계를 "과학적 이론의 세계(the world of scientific theory)"라고 지칭하면서 순수한 의미에서 과학적인 이론화는 어떤 실제적 목적에 봉사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물론 세계를 개선하려는 욕망은 인간이 과학을 취급하는 가장 강한 동기의 하나이다. 물론 과학적 이론의 적용은 세계의 지배를 위한 기술적인 장치의 발명과 연결된다. 그러나 이런 동기나 그 결과를 '세속적(worldly)'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 그 어느 것도 과학적 이론화 자체의 과정의 요소가 될 수 없다. 과학적 이론화와 일의 세계 안에서 과학을 취급하는 것은 서로 별개의 것이다. 우리의 주제는 그 중 과학적 이론화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주된 문제의 하나는 어떻게 우리 모두의 생활세계가 이론적 사변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또 그런 사변의 결과가 일의 세계 내에서 사용될 수 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이다(Schutz, 1973, pp.245-246)"

위의 인용에서 우리는 슈츠가 학문계가 세속계와 구분되는 측면을 부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학문계는 수도계의 대표가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학문계는 수도계의 하나에 불과하며, 여타의 제반 수도계와 구분됩니다. 이것은 서양의 수도계적인 가치 분류인 진선미 가운데 그 첫번째의 것을 추구하는 세계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진리를 추구하는 세계"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이는 서양식의 다른 종류의 수도계, 이를테면 선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도덕계, 그리고 미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예술계와 구분됩니다. 도덕이나 예술을 체험해본다는 것과 그것에 관해서 단지 관념적으로 구성한다는 것을 별개의 것입니다. 학문계는 가끔 다른 수도계를 인식의 대상으로 삼습니다.그러나 학문이라는 수도계와 학문이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수도계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할 세계입니다. 예컨대, 윤리와 윤리학, 그리고 예술과 예술학은 이미 강조한 바와 같이 개별적인 수도계이며 후자는 학문계라고 하는 동열의 수도계 중에서 그 개별적인 수도계를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하위의 분과학문의 계열에 속하는 것입니다.

인식하는 수도계로서의 학문과 인식 대상으로서의 수도계 가운데 어느 것을 위주로 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흔히 학자의 부류에 드는 사람들은 인식대상의 문제를 학문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오류를 범합니다. 그런 유혹은 특히 초기의 철학자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양철학에서는 과학이나 인식에 관계된 활동을 "theoria(이론)"라고 칭하고, 그것을 여타의 세계와 구분하여 그 자체의 내재적인 목표를 갖는 것으로 보아왔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여타의 세계를 "praxis(방식)"로 나타내고, 그들의 수단적인 가치만을 인정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학문의 입장에서 본 편협된 가치관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거 "praxis"의 영역으로 분류하는 윤리나 예술의 경우도 그 내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학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내재적인 목표를 가진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좀더 편협한 생각을 버리게 되면 학문활동의 주된 부분인 이론의 구성이라는 것도 결국 하나의 특수한 실천의 부류에 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학문은 분명히 수도계의 하나로서 다른 수도계와 그 나름의 한정된 경계를 갖습니다. 학자의 생활을 잘 관찰하면 그들의 주된 관심이 그 대상세계 속에 어떻게 사느냐에 있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보고 개념화하느냐에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현실 자체를 구성하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추상적인 수준에서 논증하려고 합니다.

서양의 학문은 동양의 각종 수도계와 근본에서부터 차이가 납니다. 예컨대, 동양에서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추구한 수도계는 우리가 말하는 학문계와는 구분되는 세계입니다. 공자는 행하고 남은 힘이 있거든 학문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인"의 세계를 창도한 공자는 관념의 세계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문제의 중심을 인간의 존재양식,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이에 따른 의무에 두었습니다. "해탈"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석가도 전혀 관념의 구성에는 무관심했습니다. 석가는 이른바 독화살의 예를 통해서 사물에 대한 이해가 급선무가 아님을 암시했습니다. 즉 한 사람이 독화살을 맞았다고 할 때, 그 화살을 누가 쏘았으며, 또 어떤 활로 쏘았느냐, 그 성분이 무엇이냐 등을 따지는 것은 급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모르더라도 급한 것은 그가 죽기 전에 독화살을 빼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그의 입장이 서양적인 학문에 있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요즘 서양에서도 큰 관심이 되고 있는 선의 세계도 이론적인 접근으로 침투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선의 대가들은 바로 그런 이론적인 접근이 선을 도피하려는 성향으로 보고 그 시도 자체를 질책합니다. "선"과 "선사상"은 이처럼 다른 것입니다. 동양의 수도자들은 서양의 학자들처럼 그들의 가능성을 지성화하기보다는 그들의 생활 속에서 실현하려고 했습니다. 오늘날 서양에서는 예술과 도덕을 학문과 구분하고 그 각각의 수도계적인 자율성을 인정합니다. 마찬가지로 동양의 수도계도 학문과 똑같은 비중의 무게를 부여하고 그들의 수도계적인 자율성을 인정해야만 각각의 수도계가 고유한 다양성을 가지고 생활의 풍요성에 공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동양적인 수도계를 서양식의 학문으로 환원시키려는 일부의 서투른 서양적 학문의 추종자들을 우리는 스스로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학문계는 하나인가, 여럿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앞서 굳만이 시사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해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각각의 세계는 그것보다 적은 세계로 나눌 때 다원화되고, 그것들을 총칭할 때 일원화됩니다. 세속계는 정치, 경제, 사회 등으로 세분될 수 있습니다. 수도계 역시 예술과 학문 등으로 세분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술계가 미술, 음악, 무예, 무용, 종합예술 등의 여러 장르를 가지고 있듯이 학문계도 하위 분과학문으로 세분됩니다. 이들은 서로 환원될 수 없는 자율성을 각각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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