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적 세계와 교육 1 ㅣ 다원적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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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존 교육은 곧 학교태라는 신화에서 벗어나 진짜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것입니다. 반면 이는 워낙 우리에게 새로운 인식관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일원논자와 다원론자의 두가지 부류가 흔히 대비됩니다. 전자는 가능한 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수를 하나로 수렴하려고 하고, 후자는 그 수를 다원화시키려고 합니다. 그 두 부류의 논쟁사는 사실 비교적 길며, 어떻게 보면 절충점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장상호는 이 두가지 관점의 차이는 결코 모순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원론의 입장을 최근에 대변하고 있는 굿만(N. Goodman)은 그의 <세계만들기의 제반 방식들(Ways of Worldmaking)>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오직 하나의 세계만이 있다고 하면, 그 하나의 세계는 서로 대조되는 다수의 다양한 측면을 포괄하고, 만약 다수의 세계가 있다면 그들의 모두 합한 것은 하나이다." 그러한 면에서 세계를 보는 관점은 일원적인 것일 수도 다원적인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원주의자들은 세계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오늘날의 시대는 거것을 총체성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복잡한 다원화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제 세상은 점차 복잡하게 분화되었고, 그것을 하나의 논리체계 내에서 논의하는 것 자체가 환상에 속하는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다원주의자들은 하나로 환원되어서는 안될 세계들을 각각 그들 나름의 독립된 중요성과 관심으로 체험하고 또한 그들의 범주에 알맞게 개념화하기를 바랍니다.
장상호 교수의 책은 <학문과 교육>입니다. 이것은 이미 세계에 대한 다원주의를 전제로 성립되는 말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우리가 검토하고 관련지워 보고자 하는 학문과 교육도 전반적인 거대하고 폭넓은 삶의 총체라기 보다는 국부적이고 작은 세계에 속합니다. 우리는 학문과 교육이 서로 이질적인 세계로 보며, 그것들을 구분하고 서로 관련지으려고 합니다. 사실 이들간에는 말할 필요도 없이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는 그들이 서로 동일하지 않다는 점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간의 차이를 우선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 세상에는 이 두 세계 이상의 또 다른 복수적인 세계들이 존재함을 인정해야합니다. 그 중 이 두가지를 선택한 것 자체가 이미 우리의 세상에 대한 논의가 한정된 것임을 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세계에 대해 논하기 전 다음 문제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가 여럿이라는 말은 무엇인가? 생활세계 속에서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체험하는가? 그것들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그 가운데 어떤 세계를 선택한다고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학문과 교육을 대비시켜 볼 수 있는 세계들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학문과 교육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우리의 논의와 본질적으로 무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서 배제할 수 없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다양한 세계들을 잠시나마 볼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세계는 거의 무수한 수의 다양한 하위세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은 서로 환원되어서는 안될 다양한 종류의 세계가 교차하는 영역에 위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눈에 직접 보이지는 않지만 서로 다른 목표, 구조, 인간적인 적응과 종사의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서로 영향을 주고, 병존하고, 협응합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그들은 서로 갈등하는 양상을 띠거나 혹은 우리에게 선택적인 삶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각각의 세계는 확실히 객관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가정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하게 그것뿐만은 아닙니다. 세계는 모든 순간 인간과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세계와 자아, 자아와 세계 사이에는 연속적인 변증법적인 관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쪽이 다른 쪽을 필연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쪽을 무시해서는 어느 쪽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 객관적인 것의 주관적인 것으로서의 해석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시도하는 세게구분도 그 주관적인 해석의 한가지 방식입니다. 우리의 구분은 개념적인 것임을 우선 전제해야 합니다. 우리가 접하는 어떤 현실적인 세계도 그것의 절대적인 순수함으로 나타날 수는 없습니다. 개별적인 세계는 겉보기와는 달리 독립된 사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와의 관계에 의해서 성립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의 특성만을 지적해서 그들을 구분하려는 것은 사태를 너무 쉽게 파악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하나의 특정한 세계는 그것이 다른 것과 경계를 맺고 있는 여타의 세계와 그 총체성과 관련하여 구분되어야 합니다.
총체적인 구분이라는 말, 너무 어렵습니다. 쉬운 하나의 지각적인 사건을 비유해서 이해해 보기로 합시다.
이 그림에는 두명의 여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고개를 오른 쪽으로 돌린 젊은 여성입니다. 일단 누군가 그림을 그렇게 보았다면 그 사람은 모든 것이 자명해서 이 그림에 대해서 더 이상 추궁하는 것을 중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 자명한 사실에 의심을 갖고 다시 한번 그 그림을 보면 당신은 그 젊은 여인이 사라지고 이제 꽤 나이가 든 여인이 좀 더 당신 쪽으로 얼굴을 돌려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임의로 그 중 어느 쪽을 선택해서 보거나 양 쪽 모두 주목할 수도 있습니다.
이 지각적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통찰은, 일상의 세계속에 있는 무수한 이질적인 세계들은 총체로서 구분되며, 그 구분은 우리들의 그것들에 대한 체험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림과 같이 각 세계는 우리가 그것을 여기에 특별히 제시하기 전에 이미 존재했습니다. 이 점에서 그 세계는 우리의 인식과는 독립해서 존재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식함에 있어서 그 인식과 그 실재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세계의 존재를 그것에 대한 경험 밖에서 생각하는 것은 자기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젊은 여자, 혹은 늙은 여자로 보는 것과 그 객관적인 그림과는 서로 무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의 생활에서 이런 다수의 세계와 관련을 맺고 생활하고 있지만 한 순간 그 관여하는 세계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그들을 변별적으로 상대합니다. 각각의 세게는 체험상 서로 독립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세계의 사실성에 대한 규정이 달라집니다. 이 말은 우리가 무엇이 우리가 생활에서 무엇을 우선적으로 삼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해 주목할만한 측면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고 다른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럴 때 사실은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이 세계 그 자체에 있다기 보다는 그 특정한 세계가 우리 생활에서 우리의 일단 주목을 받고 있느냐 없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이와 관련에 철학자 오우크쇼트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한 세계의 입장에서 사실인 것이 다른 것의 입장에서는 경험 밖에 있는 것이고, 따라서 전혀 실재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1933, p.327)."
즉 다원주의적 세계관을 우리가 택할 때, "실재"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세계의 어떤 것에 우리가 주목하느냐에 따라 그 규정은 상대화됩니다. 예컨대, "역사적 경험"을 할 때는 "과학적 경험"은 비실재적인 것이 되고, 반대로 과학적 경험을 할 때는 역사적인 경험이 이제는 비실재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그림에서 같은 것이 어쩔 땐 전경이 되고 다를 땐 배경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상 상이한 세계는 그것이 총체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하나를 다른 것과 전혀 독립적으로 경험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에 대한 체험을 수시로 전환한다고 할 때, 우리의 총체적인 체험구조를 변경해야 합니다. 그림에서 젊은 여인과 늙은 여인을 바라볼 때 당신은 다소의 지각상의 총체적인 변화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의미의 세계에서 다른 의미의 세계로 바꾸려면 인지양식뿐만 아니라 태도 자체를 송두리채 바꾸는 총체적인 "쇽크(shock)"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를 학문과 세계와의 관계로 가져오면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대상을 하가문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그것을 이론적인 개념에 의해서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각 세계의 질성을 이론적으로 추상화시키면 그것은 그것에 관한 분과학문이 됩니다. 우리가 앞으로 다룰 분과학문은 각각 그런 인간생활의 다른 측면을 이론적으로 포착하고자 합니다. 우리는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학문과 교육의 세계가 차지하는 위치를 밝히고, 그 두 세계간 서로 혼합되거나 혹은 그들이 관계를 맺고 있는 양상을 학문적으로 밝힐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다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해 봅시다. 우리가 분리해 낼 수 있는 세계들과 그에 상응하는 경험의 양식의 종류는 몇가지나 될까요? 이에 대해서 더러는 다섯, 더러는 일곱 하는 식의 해답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그 숫자는 거의 한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양한 세계는 계속 생성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얼마만큼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생활은 다양한 세계의 중충적 복합입니다. 각각의 세계는 미분화된 전체 생활로부터 점차 분화되면서 삶의 다양한 무늬, 결, 규칙, 특징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들은 이루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고 지금도 형성과 소멸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장상호는 그중 우리에게 편의상 "세속계", "수도계", "교육계"라는 구분을 기반으로 논의하자고 제안합니다. 물론 이것이 세계의 전부는 아닙니다. 예컨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자연계"도 있습니다. 한편 우리는 앞의 세개로 논의를 집중하고자 합니다.
사실 이러한 분류는 특별히 새삼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통상 인간생활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교육이라는 범주로 구분해 왔습니다. 그런 전통적인 구분방식을 장상호는 논의의 편의상 더욱 간략하게 수정을 가해 재분류한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라는 범주가 우리가 말하는 세속계에 해당한다고 보아서 무리가 없습니다. 문제는 문화와 종교를 어떻게 묶느냐 하는 것인데, 우리가 말하는 수도계의 경우는 문화의 종교의 공통적인 것을 주목하고 나머지를 배제한 것을 상정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수도계라는 어구로부터 혹시 세속계의 실제가 싫증나서 아부누치 언덕에 은거한 서양의 베네딕트를 연상하는 청자가 있다면 그는 어지간이 서양화된 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도계라는 말은 원래 <중용>의 첫머리에 나오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도"와 "교"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서 제시되어 있습니다. 하늘이 만물에 부여한 것을 "성"이라고 하고, 그 성에 따라 행하는 것을 "도"라고 하며, 그 도를 닦는 것을 "교"라고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이 용어의 어원은 동양적인 사상의 장구한 전통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수도계는 문화에서 외형적, 물질적인 측면을 제거하고 또 종교에서 절대성을 배제한 부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면의 정신을 개발하고 그것을 가시적으로 표현합니다. 그것이 문화입니다. 우리의 수도계는 이 내용과 실질을 토대로 내적인 자족을 중시합니다. 수도계는 표현체 혹은 편리함보다는 내면의 정신과 초월성에 큰 비중을 두는 세계입니다.
또한 수도계는 중요한 점에서 종교계와 구분됩니다. 흔히 종교는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탐닉, 의존, 우상화, 기념, 형식적인 축제, 그리고 기독교의 경우에서 보듯이 가끔은 절대적인 복종 등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수도계는 그러한 것과 무관합니다. 이러한 측면은 오히려 우리의 분류에 의하면 수도계의 세속계적인 타협이나 변질처럼 보입니다. 초창기의 정신이 후에 소멸되고 원래의 것을 단지 형식화와 주술화하여 위대성의 흔적에 기원을 담아 위안을 얻는 경우, 수도계는 이미 생생한 그 속성을 잃고 타세계로 전향됩니다.
세속계, 수도계, 그리고 교육계의 구분에서 우리가 이 저서에서 특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 마지막의 것인 교육계임은 당연합니다. 모든 세계들이 생활세계 속에 용해되어 있기 때문에 세속계와 수도계는 교육계의 선행조건이나 후속의 결과로서 교육계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속계와 수도계는 교육의 본질적인 내용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되풀이 강조하지만 교육은 다른 세계와 마찬가지로 자율적인 해석을 요구하는 세계입니다. 교육의 고유한 요소와 요소간의 관계, 그리고 요소와 전체간의 관계에 의해 스스로 설명되어야 합니다. 이를 살피기 이전, 세속계와 수도계의 특징을 살피고 그들이 교육계와 어떤 차이와 관계를 간략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시도를 함에 앞서 분명히 밝혀 두어야 할 것은 우리의 논의는 그 각각의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결코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어느 세계든 그것은 눈으로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그 각자의 세계로 진입하는 데 참조하는 단서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우리는 "자연계"를 보면서도 단지 감각적 지각에 사로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에 대한 어떤 통합적인 의미를 구성해 자연의 일관성과 규칙성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세계들은 감각, 언어등으로 쉽게 표현되거나 소통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각 세계는 그것에 대한 직접적 참여없이 단지 여타의 것과 관계로만 규정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각각의 세계는 그것에 우리가 참여하며 그 자체에 맞는 생활을 함으로써만 오직 가장 절실하게 체험될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교육의 세계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논의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교육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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