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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정체혼미 4 ㅣ 교육학의 과제

*본 기사는 "교육의 재정의" 시리즈의 4번째 컨텐츠입니다. <클릭>해서 처음부터 보시는 것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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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속 "교육사회학"을 "사회교육학"으로 대체합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교육은 곧 학교태라는 등식의 허구성을 검토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오로지 교육만 하는 것이 아니고 교육은 또한 학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편 이러한 등식을 담고 있는 신화는 너무나 허구적인 것이 당연하면서도, 우리는 이 등식의 강력한 자력에 끌려 교란받기 쉽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학문이라는 인식체계는 신화를 해체하는데 강력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일례로 "지구를 중심으로 해가 돈다"라는 상식을 파괴하기 위해 많은 과학자들의 별다른 상상력과 투쟁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육은 곧 학교태라는 등식을 깨는것에 있어서 교육학의 중요성이 커지는 부분입니다. 교육학은 "교육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학문의 세계에서는 일상세계로서의 학교와 교육의 실질이 구분될 수 있어야 합니다. 교육이 비교육과 혼동되지 않게 그 고유한 구조와 기능을 해명해 주어야 합니다.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학문으로서의 교육학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교육학자들은 교육의 문제와 관련해 전문가적 특권을 인정받아 왔습니다. 여기서 장상호가 말하는 "교육학자"란 교육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으로 기대 받는 집단, 대학의 교육학과나 교육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교육학회의 회원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교육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가끔은 정부의 정책자문에 응하며, 대중에 대해 교육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호소합니다. 숫자상으로 이들은 다른 학문집단에 비해 열세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육학자라면 대부분의 경우 교육에 대한 한두권의 책과 여러편의 논문을 내놓았기 때문에, 이 분야의 지식이 부족하다고는 보기 힘듭니다. 그 많은 학자와 지식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 주변에 교육은 곧 학교태라는 신화가 위세를 떨치고 있고 사람들은 서로 의미 있는 의사소통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개념적 혼미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교육학도들에게 들을 수 있는 가장 흔한 항변은 대중의 이해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또 대중은 교육적인 관심보다는 다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그릇된 교육관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길은 상대편의 비교육적 관심의 강세를 약화시키는데 있다고 봅니다. 한편 장상호는, 내란이라는 죄명을 쓸지는 모르더라도, 현존하는 교육학자들이 받아들이기가 거북한 곳에서 이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교육학도의 한 사람으로서 장상호가 오랫동안 자기 학문을 반성하고 회의하면서 얻은 가슴 아픈 결론입니다. 바로 교육학자들 스스로가 왜곡된 교육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차츰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결론부터 보면 현대적인 의미의 교육학은 교육은 곧 학교탤는 신화를 토대로 성립했습니다. 대체적으로 교육학자들은 학교태에 대한 연구가 교육에 대한 연구인 것으로 착각했으며, 학교태를 연구함에 있어서 스스로 교육이라고 하는 특이한 현상을 포착할 수 있는 개념이나 이론을 발전시키지 아니하고 기존의 다른 학문의 개념이나 이론을 차용함으로써 교육을 비교육의 세계로 환원시키거나 왜곡시키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따라서 장상호는 교육학자들이 대중의 그릇된 교육관을 탓하기 전 자신들의 학문 내에 침투된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는 일을 먼저 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피고석에 있는 사람보다도 고발하는 사람이 더 겁이 나는 엄청난 것입니다. 심지어 장상호의 경우 피고자이면서 동시에 고발자인만큼, 이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합니다. 교육학의 모순, 아이러니, 파라독스를 밝히기 위해 장상호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먼저 다루고자 합니다. 상식의 세계와 학문의 세계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학문의 세계에서 개별적인 학문은 왜 그리고 어떻게 출현했는가? 한 개별학문의 세계를 다른 개별학문의 개념과 이론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학문이란 인간의 특수한 인식체제로서 일상적인 인식과 크게 대조됩니다. 우리에게는 일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경험하는 세계가 있습니다. 이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이런 일상의 인식에 의문을 품는 일부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을 자처하면서, 우리의 눈에 비치는 표면적인 현상의 이면에는 모종의 보다 순수한 체계가 있음을 눈치 채고, 그것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학문 활동의 출발입니다. 학문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어떤 합의된 개념체제와 방법을 가지고 정연하게 발전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저것 단편적인 탐색을 해 나가면서 그 순수성과 체계성에 도달하는 가운데 점차 얻어진 결론은 일상세계의 이면에는 서로 다른 질서, 법칙, 그리고 내적인 구조를 가진 이질적인 세계가 병존한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개별학문이 출현하는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일상의 세게는 어떤 개념과 방법으로 보느냐에 따라 상이한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그 현상과 방법의 관계는 마치 물고기와 그물 간의 관계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물은 고기를 잡는 도구입니다. 동일한 호수에 모양이 다른 그물을 투망하면 다른 종류의 고기들이 잡힙니다. 그물이 없으면 고기가 있음을 알 수 없습니다. 또한 고기가 없는 상태에서 그물은 쓸모가 없습니다. 학문에서는 그물망과 투망이 개념적인 구성과 방법에 해당합니다. 일상적인 인식을 의심한 학자들은 그들이 창안해 낸 독특한 개념망에 따라 새롭고 상이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오랜 시도와 시행착오에 의해 학자들은 서로 환원할 수 없는 수많은 자율적인 세계들을 분리해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종합대학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다양한 학문의 영역입니다.

발전된 개별학문들은 적어도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것이 독특한 상상력을 발휘한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창안됐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현상은 이미 이전에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발견은 그것을 포착하는 개념망의 창안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각각의 학문은 고유한 개념과 방법, 그리고 인식의 수준을 평가하는 고유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조건에 의해 개별학문들의 인식대상은 다른 개별학문의 개념이나 이론에 포착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이런 요건들을 가진 학문을 자율적인 학문이라고 하며 그들은 각각 자율적인 세계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계의 탐색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만큼 자율적인 학문은 증가합니다. 지금까지의 개별학문이 밝히지 못한 무언가가 또 일단의 학자들에 의해 발전된다면 그것은 새로운 명칭의 개별학문으로서 종합대학 내에서 한 학문의 위치를 당당하게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학문적 지식에 접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접하는 일상의 세계를 보다 다채롭고 깊이 있게 비일상적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예컨대, 두 사람이 책상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말을 주고받는 하나의 일상적인 사태를 봅시다. 이것은 자연과학적인 현상으로 파악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공중에 떠오르지 않는 것은 공중의 지배를 받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주고받는 말은 물리학적으로보면 일정한 음의 진동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태를 사회과학적인 개념과 이론에 의해 사회적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적인 개념을 빌어, 이제 우리는 비로소 한 사람은 노이로제 증세를 호소하고 잇고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진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양자가 가족이 아닌 환자와 치료자의 관계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사회학적인 개념 덕분입니다. 문화인류학자는 이 상황을 주술적인 관례의 일부라는 관점에서 바라볼지도 모릅니다. 한편 경제학자는 치료자의 봉사가 갖는 경제적인 희귀성에 비추어 환자가 지불해야 하는 대금을 계산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이 이러한 장면은 언어학, 역사학, 철학, 예술과 같이 열거할 수 없는 학문적인 지평으로 열려 있습니다.

개별학문 간에 환원의 문제가 심하게 제시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생물학자는 곰팡이가 물리학적으로나 화학적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생물학적인 개념망으로 포착하려 하며, 이는 실제 곰팡이의 생물학적인 인식에 공헌합니다. 사회학자들은 모든 인간사가 심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회적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입증하는 개념과 이론을 발전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런 학문적 자율성에 대한 집념이 없이는 우리의 생활이 지닌 고유한 측면의 인식이 침해받고 손상됩니다. 생물학적 사실을 물리학적으로 환원시켜 보려고 하면 그것은 물리학적인 사실로 단순화되거나 왜곡됩니다. 사회적 사실을 심리학적으로 환원시키는 순간 우리의 생활이 갖는 내적인 의미는 일원화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서로 환원될 수 없는 사실을 그때 그때 적절하게 식별해 낼 수 있는 범주를 확보하고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논의에 비추어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칠 차례가 되었습니다. 교육학은 하나의 개별학문으로서 우리의 생활세계에 잠재된 교육현상을 고유한 것으로 포착할 수 있는 자율적인 개념망을 갖추고 있을까요? 교육은 분명히 교육나름의 구조를 가진 실체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교육이라는 것을 구태여 구분해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 실체는 따라서 그것을 고유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학문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곧 교육학이 해내야 할 과제입니다.

생활세계의 동일한 사건이나 사물도 어떤 개념망으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질서 내에서 서로 다른 위상을 차지합니다. 예를 들어 요사한 자식의 주검 앞에서 부모의 빰에 흐르는 눈물은 비극적인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눈물을 화학적인 성분의 차원에서 분석하려 한다면 그것은 분명 범주착오를 범한 사례가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육은 교육답게 이해될 수 있을 때라야만 또 다른 돋보임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교육학은 그런 돋보임을 보장하는 개념적인 틀을 구성해 줌으로써 보통사람들이 그 개념범주를 택하는 순간 "어! 여기에 또 다른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 이군!"하고 감탄할 수 있게 해야합니다.

문제는 교육학은 출범할 때부터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지 못했습니다. 정부주도의 학교가 생기기 시작하자, 교사충원의 필요성이 커졌고, 이에따라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대학에서 교육학과가 생겼습니다. 따라서 교육학은 초기부터 학교가 교육하는 곳이라는 신화를 그대로 믿었으며, 다른 제반 학문들의 개념만을 무분별하게 빌어 학교를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학교 안의 비교육적인 사실들이 밝혀지는 데 그쳤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학교 내의 잡다한 비교육적인 사실들이 교육학의 우산 아래 교육적인 사실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온갖 개념적인 혼미와 왜곡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밝혀져야 할 교육 현상은 어둠 속에 은폐되엇습니다. 교육학자들은 그 과오를 더 이상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육학은 이제부터 새롭게 재출발해야 합니다.

교육학자들은 학교에 대한 학문적인 탐구를 독점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학교 내의 비교육적인 현상을 연구하면서 교육학자의 행세를 해서도 안됩니다. 이렇게 말할 때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런 학문관이 종전에 해오던 교육학의 탐구영역을 지나치게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우려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학문은 우겨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과감하게 학교 안의 비교육적인 현상에 대한 연구는 교육학 이외의 학문에 양도해 그들이 비교육적인 현상 본연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대신 교육학자들이 해야 할 일은 우리 생활 속에 편재된 모든 교육현장을 포괄하는 보편적인 개념망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학교 밖의 거의 무한대한 생활세계가 교육학적인 설명과 해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교육학자들의 탐구영역은 양도하는 것 이상으로 확장됩니다.

그러한 면에서 교육학은 이제까지의 학문적인 종속에서 하루 빨리 탈피하는 방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장상호는 이점에서 "제 1기 교육학"과 "제 2기 교육학"을 구분하고 전자에서 후자로의 전환을 촉매하는 "반성적 교육학"을 주장합니다. 제 1기 교육학이란 지금까지 우리가 문제시해 왔던 교육학, 즉 학교태를 다양한 학문적인 개념망을 빌어 기술하거나 설명하려는 학문을 의미합니다. 이에 비해 제 2기 교육학은 그 나름의 개념망을 구성해 교육원형을 부각시키려는 교육학입니다. 이러한 변화에는 반성적인 교육학자들의 역할이 클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반성적인 교육학자란 자신이 제 1기적인 교육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의 맹점을 자각하고 다름 세대에게 제 2기적인 교육학을 기대하면서 그 방향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공헌을 하려는 학자를 말합니다.

교육이란 "가르친다"거나 "배운다"는 일상적인 개념과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배우고 가르치는 과정은 이미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하게 된 그 순간부터 있으리라고 가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을 학문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교육학자의 소임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언제쯤 교육에 과한 체계적인 지식이 얻어지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제 2기 교육학자들의 능력에 달린 문제입니다. 제 2기 교육학이 어느 정도나마 지적인 토대를 구축하려면 수십 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런 지적인 성취를 했다고 할 때, 우리의 생활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예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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