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정체혼미 3 ㅣ 학교 밖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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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고체계의 깊은 곳을 차지하고 있는 교육은 곧 학교태라는 등식을 말끔하게 해체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등식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 학교 내 비교육적 현상에 주목하는 방법을 택해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학교 밖에 있는 무수한 교육현상에 주목하는 방법을 택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날의 학교는 언제부터 생겼으며 그 이전에는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없었을까요? 잠시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해집니다. 오늘날 인류의 스승으로 숭상 받는 많은 성인들, 일가를 이룬 많은 철인, 그리고 인생을 지혜롭게 살다 간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무수한 선인들이 학교가 지구상에 생기기 이전에 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인생 자체가 훌륭한 교재였습니다. 굳이 형식을 따질 필요가 없이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간의 의미 있는 교육적 교류가 있었습니다. 아는 사람은 모르는 자를 찾았으며, 모르는 자는 아는 자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일을 제쳐놓고 이런 생활을 심각하게 추구했다는 증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히려 교육이라는 교유한 삶의 결이 어떤 것인지는 옛 사람들의 생활에서 더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예컨대, 동양의 고전에 속하는 "논어"는 그런 기록으로 가득합니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교육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 알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런 독특한 세계 속의 생활에서 인생의 보람을 찾으려고 노력한 듯합니다. 그들은 끊임없는 성찰과 성장을 생활의 지표로 삼았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들이 나오는데 이는 그들의 배움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배움에 대한 많은 바를 시사합니다.
애써서 배우지 않는 사람은 최하급의 인간이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부족함이 있기 때문에 그 과오를 따져 너무 집착하는 것은 이롭지 않다. 잘못이 있다면, 부족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아는 것이다. 지난 일은 어찌 할 수 없지만 앞으로의 일은 고칠 수 있다. 매일매일 자신의 부족한 것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주저 없이 바로잡으면 그만이다. 이렇게 보면, 배우는 사람에게는 과오가 일시적인 것이 되며 오히려 그것을 통하여 맑고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다. 높은 경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좋아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어떤 덕목을 좋아만 하여서는 안 된다. 그것을 배우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마침내는 어리석어지고 만다.
이런 배움은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까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배움이란 구하려고만 하면 생활의 어느 곳에서나 얻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말들 또한 논어의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르침에는 지위나 환경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세 사람이 동행하면 반드시 그 안에 스승이 있다. 현명한 사람을 보면 그런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자. 현명하지 않은 사람을 보면 스스로 반성해 보자. 자기보다 신분은 낮지만 그를 통하여 높은 배움에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배우고 가르치는 생활이 그 자체로서 특유하고 보람 있는 생활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배워도 싫증이 나지 않았고, 아무리 가르쳐도 지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런 목표가 흔히 세상 사람들이 탐내는 부귀영화, 권세, 명예와는 무관하게 가치로운 것으로 알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일부 학자라는 사람들이 자기의 수양보다는 명예와 세평만을 의식하여 공부하는 것을 개탄하였습니다. 자신의 명예와 세평만을 의식해 공부하는 것을 위인지학, 자기의 수양을 위해 공부하는 것을 위기지학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이런 옛 문헌에서 우리가 흥미롭게 느낄 수 있는 것은 교육의 원형이 인류역사를 통하여 그 상대적인 자율성을 지키면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이것이 충분하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옛날에는 진짜 교육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지금은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식의 개탄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날 "평생교육"이라는 말이 서서히 이런 점에 대한 재인식을 촉구하고 있으며, 소위 "학령전"의 아동들이 가진 학습력에 대한 새로운 인식, 학교 밖에서 생활하는 청소년에 대한 교육적인 배려의 움직임, 그리고 변천하는 사회에 성인들이 재적응하도록 하는 문제 등이 교육의 연령구분을 무의미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가 교육의 언어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 밖의 교육은 숲 속의 이름 없는 꽃들처럼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곳에 은폐되어 은밀하게 은은한 향기를 발하고 있을 뿐입니다.
"학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학교에서만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신화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육은 학교에 들어가기 이전부터 시작됩니다. 대부분의 현명한 부모는 학교가 자녀의 교육을 대신해 준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린이들이 그야말로 가능성의 덩어리이며 그들과 1대 1의 개별적인 접촉을 통하여 그 가능성이 자연스럽게 인격과 능력의 형태로 전환됨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자녀에게 생물학적인 탄생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교육적인 탄생을 마련할 수 있다는 보람을 확인합니다. 어떤 아동은 또한 할아버지에게서 삶의 긍지를 배우고 할머니에게서 삶의 슬기를 흡수합니다. 어린이들은 놀이터에서 또한 교육의 기회를 만납니다. 친구는 서로 말이 통하는 스승이며 제자일 수 있기 때문에 가끔 더욱 신속 있는 경험의 교류가 가능합니다. 귀가 밝은 아동과 눈이 세련된 아동이 만나면 한쪽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다른 한쪽에서 미술을 가르칩니다. 그들은 서로 알맞은 불균형과 학습동기를 유지하기 때문에 접촉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논리적인 구조와 사회적인 지식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학령기의 아동이나 청소년들의 학습은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가장 원하는 학습이 대부분 방학기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입니다. 방학이란 학업을 그만두고 잠시 쉬는 기간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학업을 중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학교에서 방해받는 자연스러운 학구열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이 이 기간 동안 열심히 뛰어다닙니다. 방학이 되면 조용하던 서점이 분비기 시작하고 교양서적이 동이 날 정도로 잘 팔립니다. 청소년 문화강좌는 출석을 부르지 않아도 항상 만원이고, 서예, 작문, 속셈, 음악을 가르치는 학원이 수입을 올립니다. 여유 있는 학생은 여행, 유적지 답사, 문화재 관찰을 떠납니다. 또 하나의 여유는 강종 심신수련회에서 얻습니다. 그들은 가정의 과보호와 학교의 시험연습이라는 질식에서 해방되어 그들의 호기심을 따라 자발적으로 인생을 체험하며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개척정신, 그리고 협동정신을 얻습니다.
학교는 빈민, 노동자, 소수집단의 자녀들과는 거리가 멀리 있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의 사다리를 따라 올라갈수록 그들은 탈락합니다. 그들은 학교 밖의 노동시장에 나가야 하는데 학교에서 발급하는 졸업증과 취학연수가 선발의 기준과 지위를 결정하기에 악순환에 빠집니다. 그러나 이런 차별과 편견이 그들의 교육을 완전히 좌절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다수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독학합니다. 그들은 직장에서 일을 배우고 역경을 이기는 투지를 얻습니다. 사회사업가, 계몽가, 대학생의 자연봉사에 의해 천막에서 이루어지는 야학이 그들의 굶주린 학구열을 부분적으로나마 만족시켜 줍니다. 이 경로를 통한 많은 훌륭한 인물들을 어떻게 무식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주변에는 교육을 학교의 "졸업식"으로 끝내버리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것이 교육입니다. 이것은 졸업식에서 교장이 흔하게 써먹는 훈시이기 때문에 다소 진부한 느낌을 주지만 우리의 생활을 깊이 주시해보면 많은 교육의 기회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오늘날 사회는 광범위한 학습자원과 효율적인 교육매체를 구비하고 있습니다. 각종 전문기관과 연구소, 서점, 박물관, 도서관, 전시관, 예술회관, 어린이 학습관은 학교가 가지지 못한 풍부한 학습자원입니다. 최근에 발전하고 있는 각종 통신매체는 상상을 초월하는 교육적 활용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료와 매체 자체가 교육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교육적 기능을 부여하는 공식이 밝혀진다면 사람들은 특별히 교육을 위하여 학교를 가야할 필요는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하여 얻고자 하는 결론은 그림과 같이 요약됩니다. 교육은 학교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학교라는 생활세계 속에서 비교육적인 요소가 혼재하고 있는 그러한 근거에 의하여 학교 밖의 생활세계에는 교육적인 요소가 혼재되어 있습니다. 교육은 생활의 한 가지 특색 있는 측면으로서 적당한 조건을 갖추면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번창할 수 있는 보편적인 생활양태입니다. 교육을 찾기 위하여 굳이 학교에까지 가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곳을 간다고 하더라도 보이는 것이 모두 교육인 것은 아닙니다. 교육을 알아보는 특수한 안목을 갖춘 사람에게만 그것이 보입니다. 또한 그런 안목을 갖춘 사람이라면 교육은 학교 아닌 어느 곳에서나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학교뿐만 아니라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가정, 놀이터, 학원, 청소년 단체, 직장, 박물관, 대중매체,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어느 곳 어느 때에나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할 것은 교육을 어떤 형식, 제도, 장소, 시간, 사람과 결부시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흔히 학교 밖의 교육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학교의 형식과 외양을 갖춘 학교 이외의 기관을 연상합니다. 예컨대, 어머니 교실, 노인학교, 방송통신대학, 사업체의 연수원, 공무원 교육원 따위가 이른바 "사회교육"의 대명사처럼 불립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연상은 교육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개념은 교육은 곧 학교태라는 등식을 연장시킨 것이거나 그것의 변형에 불과한 것입니다. 교육의 실질을 이루는 것은 형식이나 명분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에 어느 장소에서 우리가 좀 더 높은 수준의 자신과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결코 우연적인 것이 아닌 의도적인 노력의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라면, 그것 자체로서 우리는 이미 교육의 세계에 있는 것입니다. 교육은 인생의 어느 시기나 어느 곳에서든 간에 그것을 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삶의 독특한 보람입니다. 교육적인 체험은 낯선 거리, 전선의 참호, 임종의 시간을 기다리는 병실, 철창이 있는 감옥 같은 곳에서도 찾아집니다. 인간에게 있어 자기수련은 다른 목적이 부대되지 않은 그 자체의 목적을 가집니다. 서로가 도울 수는 있으나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 배움의 길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점에서 외로운 독학자들입니다. 그것을 외롭지 않도록 해주고 또한 시행착오를 줄여 주는 것이 교육의 다른 한 측면인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배움은 궁극적으로 개개인의 주체적인 선택과 통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육은 그것을 절실한 자신의 것으로 체험하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그 무엇입니다.
우리는 지난 총 3개의 영상을 통해 교육은 곧 학교태라는 인식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교육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교육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가진다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생활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예상입니다. 그것은 누차 장상호가 지적했듯이 학교태에 대한 신화를 대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육의 해석적인 체제 내에서 생활의 여러 국면에 판단을 내릴 감식력을 갖게 될 것이고, 그것에 의존하여 학교와 학교 밖의 전체적인 교육을 고려하게 될 것입니다. 학교가 교육을 빙자해 어떤 다른 일을 벌이고 있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또한 학교 밖에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의미화의 개념적인 체제가 없었기 때문에 충분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교육의 측면이 생활세계의 곳곳에서 각광을 받아 부각될 것입니다. 교육은 전문가들에 의하여 특수한 장소에서 특수한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체육이 선수촌에서 선수들이 하는 어떤 특수한 일이 아닌 이치와 같습니다.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승이며 제자일 수 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서 미술을 배우고 당신은 저에게서 음악을 배우는 교육적인 교환이 보편화되는 사회가 그때쯤 가능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일상화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교육적으로 풍족한 세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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