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정체혼미 2 ㅣ 학교 속 비교육
*본 기사는 "교육의 재정의" 시리즈의 2번째 컨텐츠입니다. <클릭>해서 처음부터 보시는 것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저작권상의 이유로 영상이 차단되었으나 교육판은 해당 영상이 저작물의 공정이용에 해당한다고 생각해 페이스북에 영상을 재게시했습니다. 이 링크에서 영상을 봐주시길 바랍니다.
*어려운 단어가 있나요? 용어사전을 활용해보세요.
학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기관이자 생생한 생활세계이기에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처럼 다양한 시각에 의하여 다양하게 나타나는 현상을 모두 교육이라고 지칭한다면 우리는 생산적인 논의를할 수 없습니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학교 안에 교육과 구분되어야 할 여타의 현상들, 즉 학교 안의 비교육이 존재함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흔히 '비교육'이라는 말은 어감상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지칭하는 용도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용은 교육과 비교육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왜곡시킵니다. 세상에 모든 "좋은 것"이 교육은 아닙니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과정은 그 나름의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장상호는 이러한 가치와 무관하게, 교육 외의 것들이 학교 내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학교를 오로지 교육의 관점으로 보는 것보다 학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학교가 어떤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곳을 방문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지구상에는 온갖 종류의 학교들이 존재하지만, 그 중 쉬운 곳을 선택해봅시다. 다만 그 전에 몇가지 점들을 다짐해야 합니다. 하나는 학교 내부의 물체, 사건, 활동, 혹은 사람들에게 부여된 명칭이나 용어에 구애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언어는 대소변 보는 장소를 화장실로, 무직의 건달을 사장님으로, 감옥을 교도소로 치장시키는 마력을 가집니다. 이러한 완곡어법은 사태의 정확한 파악을 방해합니다. 이러한 관례적 인식의 틀을 벗어나 마치 이상한 나라에 온 엘리스의 눈 혹은 지구를 방분한 외계인의 눈과 같이 모든 것을 새롭게 보아 봅시다. 또 하나는 교육이라는 것과 교육과 관계 있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교육과 관계가 있다고 해 그것이 곧 교육이라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서울에 소재한 어떤 고등학교를 생각해 봅시다. 첫 눈에 인상적인 것이 담장입니다. 이것 없이는 학교와 다른 세계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수용소보다는 출입이 자유롭지만 출입하는 사람과 시간이 통제됩니다. 이는 담장 안과 밖의 생활에 차이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학교는 우선 물리적으로 볼 때 삶을 풍부하게 체험하기에는 너무도 빈궁한 환경으로 보입니다. 심미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커다란 시멘트 건물은 똑같은 크기의 칸막이로 분할되어 있으며 약 30~40명의 젊은이들이 그 좁은 각각의 칸막이 속에서 하루종일 갇혀 있습니다. 내부시설은 극히 생략적입니다. 고정된 책상에 정숙히 앉아 있다가 휴식시간이 되면 생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생들이 한꺼번에 밖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변소와 수돗물을 찾지만 대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조급하게 서두르게 됩니다.
학교는 국가적 관료체제의 일부로 존재합니다. 정권이 바뀌고 교육부장관이 바뀔때마다 정책도 바뀌는 것이 통례이지만 대개 그것은 정책담당자의 관심과 이해관계의 틀 안에서 규정됩니다. 윗사람이 아래 사람에게 뜻을 전하기는 쉽지만 반대 방향으론 어렵습니다. 많은 공문이 지시의 형태로 접수되며, 그 가운데 대부분은 기존의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이념, 가치, 태도, 기술 등을 강조하되 현존하는 정권에 대한 비판은 일체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른바 교육계획은 "자원의 부족", "산업전사", "기술혁신의 주도", "고급인력 양성"이라는 일련의 경제적 슬로건의 위력 하에 짜집니다. 계량화와 체제분석의 방법을 동원해 학생들의 상품적 가치가 산출됩니다. 학교는 또한 교수자의 원칙보단는 행정의 편의와 능률을 위한 각종의 공문내용, 그리고 대규모의 관료체제 안에 흔히 있기 마련인 형식주의를 흡수해야만 합니다. 또한 학교는 행정적인 명령이나 지시와는 이질적인 특별한 압력을 도외시할 수 없습니다. 바로 자녀를 학교에 보낸 학부모의 요구입니다. 실질적인 압력을 줄 수 있는 학부모의 계층은 대개 중류 이상입니다. 학교에 대한 그들의 기대는 소아적인 것이 특징입니다. 이들은 대개 "학업성적"으로 대변되는 학교에서의 적응이 다른 높은 학교 혹은 대학에 들어가는 요건이 되며 그 곳에서 발부하는 졸업장이 사회적 진출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효과적인 무기임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 대단히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교과의 본질적인 내용과 교육의 본질적인 과정보다는 자기 자녀의 시험성적과 일류대학의 진학에만 관심을 쏟습니다. 좋은 학교는 상급학교 진학실적으로 평가되며 훌륭한 교사는 특별히 자기 자녀의 성적을 다른 자녀에 비하여 높여주는 사람으로 규정됩니다. 약삭빠른 교장과 교사는 이런 학부모의 기대와 쉽게 결탁합니다. 교장, 교사, 학부모 그리고 학생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높은 성적을 얻어내느냐에 집중됩니다. 학생들은 시험점수를 기준으로 일차원적으로 서열화됩니다. 교과 성적이 높으면 품행도 단정한 것으로 간주되며, 이 절박한 목표 앞에 교육의 목적이니 보람이니 하는 말은 오히려 거추장스럽습니다. 시험에 대한 관심은 무엇을 얼마나 타당하게 측정하느냐에 있지 않고 그것이 얼마나 객관성을 보장하느냐에 있습니다. 따라서 시험범위는 교과서의 특정한 페이지 수로 한정됩니다. 그 밖에서 시험문제가 출제된다면 그것은 공정한 것이 아닙니다. 교과서의 범위 내에서도 그 답이 모호한 시험문제는 공정성의 시비에 말려듭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정답이고 그 밖의 것은 오답입니다. 따라서 교과서의 내용을 컴퓨터처럼 기억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시험준비의 전략입니다. 또한 이 시험형식의 절묘한 점은 그 반응에 대한 판단 - 즉 채점을 컴퓨터에 맡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교과서는 일군의 학자들에 의하여 집필되며, 그것은 정부의 인가를 받아 출판되고 학교에서는 오로지 그 교과서의 내용만을 진이 빠지도록 가르치고 배웁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일종의 종교 경전에 해당하는 지위와 위력을 가져서 교과서 이외의 수필을 읽는 것은 국어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시간낭비입니다. 특정한 교과서와의 씨름은 초등학교에서부터 시작되지만 고등학교에 이르러 학교의 정규시간 이상으로 연장됩니다. 아침자율학습, 야간자율학습, 보충수업, TV수업, 인터넷수업, 토요일과 일요일 수업, 방학수업, 숙제 등이 오로지 그 얄팍하고 일률적인 교과서의 규격품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일류대학을 꿈꾸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라면 하루에 4~6시간의 수면시간을 제외하고 이런 종류의 "공부"에 전 시간을 바칩니다. 그들은 이 때문에 교과서 이외의 고전을 읽고, 명곡과 명화를 감상하고, 자기성장에 의미있는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박사가 되었을까요? 교과서의 내용 가운데 상당한 부분은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조만간 쓸모없이 되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판명될 것입니다. 학문의 눈부신 발전이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이 세상에 정답다운 정답이 도대체 얼마나 존재할까요? 교과서의 상당한 부분은 어쩔 수 없이 특정집단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합니다. 대학의 교수는 그래서 얄팍한 교과서를 쓰인 달달 외운 많은 컴퓨터들을 대학에서 맞이합니다. 그들은 교과서에 쓰인 정보를 있는 그대로 재생할 뿐 그 내용에서 새로운 문제를 발견한다거나, 그 내용을 생활에서 응용해 보거나, 혹은 그 내용에 대한 자신의 의견 혹은 비판을 가하는 능력이나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교과서 내용을 믿는 신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시험을 자주 봅니다. 이 행사는 단순히 학생들의 실력을 알아본다는 의미 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실제로 시험보는 기술을 훈련하며 연습합니다. 동일한 교과서의 한정된 범위 내에서 중간고사, 기말고사, 모의고사 등을 보고 시중의 출판사는 정답을 독점할 수 있는 시험문제만을 다룬 별도의 "완전한" 참고서를 경쟁적으로 출판해냅니다. 따라서 서로 다른 시험문제를 출제하는 일도 큰 고충의 하나가 됩니다. 출제문제가 동이 나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기발한 문제가 등장합니다.
38. 남해지방을 여행하면서 무엇을 생각했는가?
1) 아름다운 경치
2) 수산자원
3) 옛고향
4) 이순신 장군
아마 이 문제를 놓고 정답을 맞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출제교사의 생각에는 정답이 분명하게 있으며 대부분의 학생들도 그 정답에 승복합니다. 여기서 정답은 4)번인데, 왜냐하면 교과서에 "나는 남해를 여행하면서 이순신 장군을 생각했다"라는 구절이 분명하게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는 이런 종류의 기발한 정답이 무수하며 그것을 중심으로 온갖 희비극이 일어납니다.
젊은이들은 이런 무의미한 학교생활의 생존경쟁에 적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들은 인생의 진리가 선택지의 어느 하나로 분류될 수 없음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습니다. 이런 학교생활이 인격의 함양과 무관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같은 교과서 내용을 수십 차례 암송하면서 그들은 점점 잊혀져 가는 학습에 대한 그들의 애정을 향수처럼 달랩니다. 그러나 이런 잠시 동안의 생각도 그들이 위치한 사다리를 흔들어 놓는 위험신호가 됩니다. 어떤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은 학교생활에 대한 회의, 점수경쟁에서 비롯된 긴장, 불안감, 질투 속에서 신경증 증세를 보이며 흔들리는 사다리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중간에 매달려 "도와주세요!"라고 눈물겨운 애원을 하곤 합니다. 이런 학생 가운데는 "학교는 공부만 하라고 하고 사람되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는 아이러니컬한 유서를 남기고 삶 자체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이런 비극적 사례가 신문에서 가끔 보도되지만 학교가 그것을 자성의 계기로 삼았다는 소식은 없습니다. "공부를 하라"고 했다는 그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학교 당국이 오히려 자부심을 느껴서일주도 모르겠습니다.
한 좁은 공간에 30~40명의 학생들을 수용해 놓고 그들에게 의미있는 학습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용량과 유형이 다른 30~40대의 컴퓨터가 같은 용량의 정보자료를 입력할 수는 없습니다. 일방적인 주입과 소화불량의 불균형 속에서 이른바 최선의 해결책이 나옵니다. 그것은 학교의 진학 실적을 높일 수 있는 상위그룹을 기준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것입니다. 진학할 여건이 되지 못하거나 하위집단에 속한 학생들은 이제 학습에서 소외됩니다. 그 학생들은 당국에 그 처사를 항의하기는 커녕 그들 스스로를 죄인시합니다. 학교는 그 원인을 학생의 능력과 동기의 부족으로 돌리고 학생들은 이를 의심없이 받아들입니다. 능력이 없다고 하지만 사실 그 능력이 키워주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 아니던가요. 병원에서 중병환자를 죄악시한다거나 병원 밖으로 내쫓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 처사를 크게 비난할 것입니다. 그러나 학교는 능력없고 성적이 뒤진다는 이유로 젊은이들을 경원시하고 내쫓으면서도 그것의 존립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하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은 혈기왕성합니다. 오늘날 그들의 학교생활은 고함을 질러도 후련하지 않을 정도로 불편합니다. 학습에서 좌절하거나 소외된 대다수의 학생들은 그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떠들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규칙에서 이탈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주목을 끌기 위해 비행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학교는 이를 방치할 수 없어 "침묵은 금", "정숙"이라는 표어가 나붙고 지시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과 복종을 미덕시하는 학교풍토를 조성합니다. 학교의 규정은 복잡해지고 퇴학처분의 위협이 강조됩니다.
오늘날 학교에 관해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상호는 지면관계로 여기서 중단합니다. 어떤 학교 관계자는 그의 묘사가 지나치게 편파적이라고 할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은 "지금의 학교 상황에서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테냐"고 항의할 법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가 의도하는 것은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책임을 돌리려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안이한 생각에 반증적인 자료를 제공하려는 데 있습니다. 다른 학교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학교만은 그렇지 않다고 항변해도 상관없습니다. 전체에 공감하지 않지만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한다면 그의 주장은 성립합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이른바 "기능적 고착증세(functional fixedness)"가 우리에게 있음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사물의 용도를 특정한 것으로 국한시키는 융통성 없고 사리에 어긋난 사고형태를 말합니다. 이를테면 이 증세를 가진 사람은 망치를 볼 때 오로지 못을 치는 도구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흉악범은 망치로 사람의 머리를 내려 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무직원은 바람에 날리는 서류를 고정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용을 보고 망치를 오용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학교를 생각할 때 흔히 그런 기능적 고창증세에 빠집니다. 흔히 학교의 기능을 말할 때 오로지 교육이라는 명분론을 만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명분론은 사실이 아닌 만큼 허위적이며 그것이 배타적인 만큼 비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앞서 검토했던 학교에 대한 묘사는 그 자체가 제한적인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내에 도대체 교육이라고 할 수 없는 다양한 것들이 혼재함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장상호는 그래서 학교에 대한 묘사를 토대로 학교가 수행하고 있는 교육이 아닌 기능 몇 가지를 지적합니다.
하나는 젊은이들을 효과적으로 수용하는 기능입니다. 현대 사회는 날로 분업화되고 있으며 젊은이들은 그 산업구조에 적응할 만한 능력과 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유예기에 있는 수많은 인구를 어떻게 보호 감독하느냐 하는 문제가 파생됩니다. 이전에는 가정이 그런 기능을 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그 기능을 학교가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의무교육이라는 명분은 출석을 강요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높은 담장, 30~40명을 좁은 공간에 묶어놓는 교실, 엄격한 시간계획과 규율에 의한 규칙적인 생활, 각종 벌 등이 이 효용성을 보장합니다.
또 학교는 정치적 기능을 합니다. 사회를 안정시켜 주는 것은 통치질서인데, 한 국가의 권력을 거머쥔 집단의 입장에서는 기존의 질서가 안전을 보장해 주기 때문에 현상유지의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은 어떻게보면 당연합니다. 반면 이는 법률적인 제약과 사회적인 규범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기존 사회적 구조에 사람들을 동조하게 하는 특정한 이데올로기, 신념, 습관, 태도, 가치관을 주입시켜야 합니다. 억압적인 정권은 억압받는 사람들이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경로에 의하여 억압적인 상황을 수락하도록 조건화시키는 수단을 쓸 수도 있습니다. 학교는 이점에서 정치집단에게 매력적인 기관입니다. 각종의 행정지시, 교과서의 검인정, 복종의 미덕화 등이 학교를 통제하기 좋은 수단이 됩니다.
학교의 경제적 기능은 너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학교 덕분에 생계를 유지한다는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학교는 산업사회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한다는 점에서 엄청난 경제적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되도록 적게 투자해서 많은 이득을 얻는 것이 경제원칙인데, 우리나라의 학교는 이 경제적 이득을 올리는 전형적인 장소입니다. 해방 직후와 별다르지 않은 학교시설에서 수많은 값싼 인력이 배출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학교는 어느 사회집단의 시설에 비해도 낙후된 실정입니다. 그만큼 학교는 그것이 공헌했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눈부신 경제발전의 혜택에서 스스로 소외되어 있으면서도 꾸준하게 인력이라는 재화를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학교는 또한 사회적 기능을 합니다. 어느 사회나 구성원의 역할과 위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누군가는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누군가는 낮은 지위를 수락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학교는 그 지위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습니다. 사람들이 자녀를 어떻든지 간에 학교에 보내려고 하는 이유도 졸업 후 높은 지위를 얻는데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려는 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 기능이 학교에 주어지지 않았다면 현재의 학교 인구는 반감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젊은이들은 학교 내의 온갖 부조리한 경험들을 감내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학교가 더욱 배움이 필요한 젊은이들을 오히려 소외시키고 내쫓는 역설적인 제도임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역설은 학교의 사회적 기능과 관련해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학교는 입학, 졸업, 증명서 발급 등에 의해 사람들을 선발하고, 서열을 매기고, 장차의 직업지위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학교는 지금까지 열거한 기능 외에 또 수많은 기능을 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학교의 기능 가운데는 말할 필요도 없이 교육의 기능이 다소 포함되어 있을 것이고 또 있어야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러나 학교의 기능과 교육의 기능은 개념상 엄격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학교의 기능은 마치 망치의 그것처럼 무수한 기능의 복합으로 규정됩니다. 그 기능의 전체는 항상 열려있습니다. 이에 비해 교육의 기능은 그 자체에 묶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육은 그 특수한 기능에 의하여 규정되는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컨대 "학교의 사회적 기능"이라는 말은 성립되지만 "교육의 사회적 기능"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비교육적 기능을 교육적 기능에 의하여 규정할 수 없고 교육적 기능을 비교육적 기능에 의하여 규정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교육의 사회적 기능"이라는 말은 교육이 곧 학교태라고 하는 신화에서 파생된 잘못된 개념입니다.
결국 장상호의 기나긴 논의에서 얻어내려는 결론은 그림과 같이 요약됩니다. 학교 안에는 교육의 범주에 넣을 수 없는 무수한 과정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보기에 따라 그것은 다른 모양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학교는 역사적 사실이라 그것은 과거의 소산으로서 그때그때 그것이 지녔던 의미체제가 오늘을 사는 사람에게 번역되어야만 입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어떤 대상입니다. 그것의 역사적 의미를 오로지 교육이라는 참고체제로만 파악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학교에서는 마음의 문제를 가진 무수한 개인들이 있으므로 그것의 심리적 현상을 볼 수 있으며, 그 개개인의 단순한 집합으로 환원되지 않는 표준과 질서가 있으므로 사회적 사실로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권력의 행사와 배분, 자원의 창출과 소비, 그리고 상징내용의 교류가 있으며, 그만큼 그것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현상으로도 ㅂ볼 수 있습니다. 학교는 모종의 제도적 요구와 법적 제한에 부응해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행정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외에도 우리는 물리학적, 공학적, 생태학적, 문화적, 예술적, 철학적인 안목을 동원하여 학교에 대한 더 넓은 이해를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교육은 곧 학교태라는 인식은 양자의 올바른 이해를 방해할 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문제풀이를 어렵게 만듭니다. 학교의 문제는 교육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인간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다양한 욕구의 충족과 다양한 가치의 실현이고, 젊은이들이 거의 하루 종일 생활하고 있는 학교는 그런 다양한 욕구와 가치의 병립과 추가라는 관점에서 이해되고 운영되어야 합니다. 예컨대, 학생들은 교육적인 욕구뿐만 아니라 의미있는 생활을 위해 최소한 충족되어야 할 허다한 욕구를 가지고 있음을 고려해야 합니다. 반드시 교육과 관련이 없더라도 적어도 오늘날 중류가정에서 누리고 있는 생활시설을 학교에 마련하고, 정치적인 민주화와 사회적인 평등이 역사적으로 추구해 온 바람직한 삶의 조건이라면 학생들도 학교에서 그 조건 속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은 학교가 교육하는 곳이라는 명분에 의하여 정당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조건은 우리들의 소중한 젊은이들이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생활한다는 사실만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학교를 오로지 교육으로만 결부시켜 보려는 편협한 관점 때문에 오히려 학교 내에서 이런 조건의 개선이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육은 곧 학교태라는 인식은 학교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온갖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들이 교육의 이름으로 위장되거나 합리화되게 합니다. 국민에 대하여 억압적인 통제와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주입은 정치적으로 보더라도 바람직한 현상은 아닙니다. 수용소적인 생활과 학교에 의한 사생활의 박탈은 사회적으로 봐도 바람직한 생활양식이 아닙니다. 거대한 관료체제의 비능률은 행정적으로 봐도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각종의 비교육적인 집단 생활의 횡포와 비리 등이 교육과 동일시되거나 교육과 불가피한 연관관계를 갖는 것으로 오인됩니다. 더욱 교육을 위해 불행한 일은 그로 인하여 사람들이 교육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육의 진정한 체험을 하지 못한 채 교육 하면 학교 생활의 부정적인 측면을 연상하고 교육이란 될 수 있는 한 피해야 할 어떤 혐오의 대상으로 인식합니다. 일부는 교육이 출세를 위한 지루하고 견디기 어려운 노동의 현장으로 보고 일부는 잊고 싶은 과거사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학교의 졸업과 동시에 교육과 담을 쌓습니다.
학교는 그것이 제도적인 수준에서 표방하고 있듯이 가능한 교육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학교의 제도적 권위와 교육의 실질적 권위를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제도적 권위는 교육의 실질적 권위에 비추어 계속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학교 내의 비교육적인 과정들, 즉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그리고 그것이 수용할 수 있는 온갖 형용사적 현상이 있음을 시인하고 교육이 어떻게 그런 제반 사실들과 가장 효율적으로 병립할 수 있는가를 궁리해야 합니다. 교육과 비교육은 가끔 서로 갈등하며 대립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학교는 가르치는 일은 하지 않고 출석만을 강요하거나, 특정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맹신시키거나, 교육의 원칙은 무시하고 행정의 능률과 편의만을 앞세우거나, 인력의 수요공급만을 계산해 "교육계획"을 세우거나, 대학진학에 관련있는 교과목만을 가르치거나, 지적 능력과 경제적 능력이 있는 학생만 골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우리는 학교의 교육적 기능을 강조하고 대변하면서 다른 것과의 협조와 타협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러나 학교의 진정한 교육화를 향한 이런 과제의 수행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학교태와 교육간의 개념적인 분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