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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정체혼미 1

  • 2017년 2월 2일
  • 4분 분량

*본 기사는 "교육의 재정의" 시리즈의 1번째 컨텐츠입니다.

*다음 컨텐츠 (교육의 정체혼미 2 ㅣ 학교 속 비교육) 보기 (클릭)

*어려운 단어가 있나요? 용어사전을 활용해보세요.

교육은 정말 심각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모두가 교육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일가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수많은 학자, 운동가, 교육자들이 교육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대한 움직임속, 한 학자가 이러한 움직임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육의 문제와 그 해결책에 집중하는 반면, 이 학자는 우리가 교육을 인식하는데 있어서의 혼란과 무질서를 지적하고 나섰습니다. 그 학자는 바로 장상호 교수입니다.

한번 장상호 교수는 일단의 교장선생님들에게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던지고 원고지 약 20매의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요청했습니다. 이는 교육계에서 오래 종사한 사람에게 던지기에는 너무 쉬운, 혹은 무례한 과제일 수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장교수는 의외의 결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교장선생님들의 후일담에 따르면 그들의 교육에 대한 개념이 빈궁함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수십년간 교육의 현장에 종사해 온 전문가들에게 이러한 질문이 당혹한 문제라는 것은 놀라워도, 사실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면 교육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쉽게 찾기 어려워 보입니다.

하지만 장교수는 이러한 상황이 심각한 문제임을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라도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에 대한 의미의 일치가 있지 않다면 그 논의는 건설적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어 장교수는 교육에 대한 의미의 혼란을 유형별로 분류합니다.

하나는 앞의 교장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 없이도 교육에 대해 중구난방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장교수는 이러한 경우 우리들의 올바른 태도는 말하기 전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고, 남의 말을 경청하며, 어느 정도의 지식에 도달할 때까지 적어도 침묵을 지키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또 다른 유형은 교육이 아닌 경우를 교육이라고 지칭하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인간사를 흔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교육이라는 범주로 구분합니다. 물론 서로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어 경제가 호황일 경우 정부에 대한 정치적 지지가 더 높아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현상을 경제라는 말로 지칭한다면 그것은 누가 봐도 웃길 것입니다. 반면 반값등록금과 같은 경제 문제를 교육 문제로 보는 것과 같이 많은 경우에 교육이라는 말은 교육이 아닌 것들과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언어는 교육을 체계적으로 왜곡시키고 교육의 문제를 엉뚱한 문제로 오도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경우는 교육 그 자체에 대한 문제는 무시한 채 그것의 의의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육이 정치발전, 경제발전, 사회발전, 문화발전에 기여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때론 우리는 이를 “교육의 도구적 관점”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러한 관점은 교육을 논하는데 의미있는 기여를 할 수 없습니다. 예로 정치발전의 문제는 말 그대로 정치의 문제이며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물론 정치의 문제는 교육 혹은 경제의 문제와 관련성을 가지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기여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잘 작동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의 경우는 가장 흔하면서도 교묘한 수법입니다. 바로 “그릇된 교육”이라거나 “왜곡된 교육”이라는 표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표현은 사실 청자나 독자에게 강한 감정적 호소력을 갖습니다. 요즘과 같이 모든 것이 문제인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이러한 말은 사회적 부조리를 들춰내는 유명인사의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좋게 본다면 이는 교육의 개선을 촉구하는 의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논리적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표현은 아무런 의미를 담고 있지 못합니다. 그릇되거나 왜곡된 교육은 이미 그 자체로 교육이 아닙니다. 만약 교육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사이비교육”이거나 “유사교육”일 것입니다. 이러한 논의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교육다운 교육” 혹은 “옳은 교육”에 대한 개념이 있어야 하지만 사실 “그릇된 교육”을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이러한 개념을 듣기에는 어렵습니다.

만약 건설적 논의를 위한 개념의 통일만이 시급한 문제라면 어떤 청자는 적절한 대안을 머리에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학교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현상을 교육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장상호는 이를 “교육=학교태”라고 지칭합니다. 학교태는 그야말로 눈으로 식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 대부분의 현대인이 수용하고 있는 교육에 대한 개념이기도 합니다. 집에 있으면 노는 것이고 학교에 가면 공부하는 것이며, 학교에 머무르는 횟수가 한 사람의 교육경력으로 간주됩니다. 학교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무식쟁이이며, 학교의 수가 많을수록 그만큼 교육이 확장되는 것이고, 그곳을 거쳐 나오는 사람의 수가 많을 수록 교육받은 인구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를 많이 세우고,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 살기를 기대하는 일종의 신화를 믿고 있습니다.

반면 장상호는 이러한 신화가 교육이라는 개념 자체를 무용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앞에서 이야기한 개념적 혼돈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학교태와 교육을 일치시키는 등식은 왜 학교생활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 교육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고 간주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교육에 대한 일가견을 피력하고 싶어하는지 설명해줍니다. 학교는 하지만 교육과 같은 인식론적 틀이 아닌 하나의 생활세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모든 인간이 만든 기관이 그러하듯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과 같은 다양한 방면해서 해석할 수 있는 다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학교에 대해 다른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부는 개인적 출세를 생각하고, 다른 일부는 좀더 거창하게 국가발전은 외칩니다. 그리고 학교가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교육이 잘못되었거나 교육이 왜곡되었다고 질타합니다. 이것은 지나치게 편리한 사고방식입니다. 왜냐하면 교육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것만 같은 이러한 등식의 맹점은 그것이 교육에 관한 어떤 일관성있는 논의도 불가능하게 만드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등식에서 교육이라는 말은 그것의 고유한 의미가 없이 학교 속에 있는 잡다한 현상을 대표하고나 혹은 학교 속에 내재된 모순을 그럴듯하게 위장하는 구실밖에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장상호는 교육과 학교태 모두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개념을 개념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 둘을 개념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경험적으로 분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경험적으로는 학교와 교육이 공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학교와 교육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념의 분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교육의 대한 정의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것을 대체할만한 강력하고 체계적인 인식체계를 구성해 그것에 충격을 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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