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의 다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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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의 다양성 - ‘수능의 아버지’ 박도순 초대 평가위원장
위 기사는 ‘프로젝트 위기’에서 있었던 ‘컨퍼런스 위기 2016 WINTER’에서의 강의 중 ‘박도순’ 초대 평가위원장의 강의를 필사, 정리하였음을 밝힙니다.
강의 원본 : youtube.com/watch?v=qU9wJk1272Y
오늘 제가 드릴 말씀은 평가의 다양성이라는 주제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기 전에 몇 가지 전제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교육에서 평가는 다른 평가와는 다르게 교육과 관련되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교육을 어떻게 볼 것이냐 입니다. 교육 평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육의 본질이 무엇이냐를 생각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그런 경험을 잘 못하셨겠지만 외국의 교육 평가책을 보면 대게 첫번째 내용이 평가의 철학에 대해 나옵니다. 우선 교육을 어떠한 시각으로 볼 것인가가 제일 중요합니다. 국가발전과 경제발전에 기여하기 때문에 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겁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부존자원형 나라에는 교육을 통해서 국가발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이는 교육을 보는 '기능적 시각' 입니다. 이러한 시각으로 교육을 보는 것은 우리 사회에 굉장히 팽배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교육을 이야기할 때 늘 무슨 교육은 굉장히 효율성이 높아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한 말은 교육을 어떤 도구로써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육을 통해서 무엇을 잘 하려고, 그것을 잘 하기 위해서 아주 효율적인 교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주위에서 이러한 현상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둘러앉고 있으면 모두가 말을 하죠. "~위하여!" 이러한 것은 전형적인 기능적 시야입니다.
또 하나의 시각은 교육이라는 것은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시각입니다. 실제로 교육 자체로의 의미가 있으려면 모든 사람들이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웠나 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공부를 하실 때 얼마나 즐거우셨습니까? 교육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즐거움이고 행복입니다. 그 말은 어떤 학교든지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학교는 즐거워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은 직장에서도 즐거워야 한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저는 한마디로 좋은 학교라는 것은 학생들이 학교에 가고 싶어하는 학교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옛날에 미국에 유학을 간 적이 있습니다. 우리 애들이 마침 초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미국에는 겨울방학이 비교적 짧습니다. 한 열흘정도 되는데 아이들이 계속 학교를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왜 아이들이 학교를 가고 싶어할까 유심히 살펴보니 이유가 있더라고요. 저도 마찬가지로 교육학을 전공하면서도 공부를 하다 보니까 교과서, 전과 등을 사서 공부했습니다. 집에 가면 엄마가 공부하라고 말을 항상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닌데 즐거울 수가 없죠. 그런데 어느날 저희 아이가 선생님에게 수영이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수영장에 대리고 가더라고요.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주는 거죠. 그리고 학교에서 공부하라는 말을 많이 안 하더라고요. 그 안하는 것이 어느 정도냐면 졸업식에서 우리 애기가 대상을 받았더라고요. 대상을 받으면 멀 하냐고 물었더니 답사를 간다고 그러더라고요. 어떻게 선정을 했냐고 물어봤더니 친구들끼리 투표를 했다는 거에요. 인간관계가 제일 좋은 사람이 대상이라는 거죠. 그리고 상 주는 것을 봤더니 전부 동아리 활동, 예체는 활동밖에 없는 거에요. 또 하나의 이유는 선생님의 관심이나 이야기하는 시간이 부모들보다 훨씬 많습니다. 부모보다 학생을 더 잘 아는 거죠. 학교에 한번 가봤는데 모든 교사들이 학생들이 집에 가는 것을 배웅해주더라고요. 그러한 것들이 종합적으로 학교 가는 것을 좋아하게 하는 것이더라고요. 그 때 우리나라에서는 방학 때 학생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밖으로 나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랬습니다. 저런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 소리 지르면서 등교하는 사진을 보여줘야 되는 게 아닌가. 그니까 학교라는 것은 즐거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학교가 즐겁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효율성보다는 내가 하는 일에 만족을 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러한 시각을 가지게 하면 교육을 보는 시각이 바뀌죠.
평가라는 것은 우리가 학교생활을 하는 모든 것에 해당이 돼서 저희에게 스트레스를 줍니다. 아마 학교 가기 싫어하는 원인을 찾다보면 평가와 관련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학교에서 평가를 추방을 시키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학교에서 시험을 없앤다. 제가 보기에는 우리나라 절대 안 망합니다. 지금하고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차이는 시험과 같은 것은 외적 자극을 주죠. 때로는 그러한 것이 내적 자극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제 말은 억지로 하라고 해서 했는데 공부가 재미있어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경우는 많죠. 예를 들어서 선생님이 좋아져서 그 과목을 좋아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겠지만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문제점이 많습니다.
교육을 생각할 때 개인차를 인정해줘야 합니다. 개인차를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은 교육심리학의 가장 큰 공통적인 결론입니다.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적성, 잠재능력을 개발해 주는 것이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하면 지금의 평가제도는 엄청난 개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의 평가제도는 학력이면 차이가 있는 것이 본인 때문인 것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죠. 본인에게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가에서는 몇 가지 보는 관점이 있는데 평가를 다른 사람과 구분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시험을 보는 것입니다. 한 반에서 시험을 보았을 때 모든 학생이 100점을 맞았다고 생각해봐요. 이때 출제자가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무엇일까요? 시험문제를 쉽게 내지 않았나 입니다. 그것은 전제에 모두가 만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만점을 받으면 안 되는 거죠. 그러한 시각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있습니다. 30명의 학생이 만점을 받았을 때 내가 잘 가르쳤고, 학생들이 열심히 했구나. 이 두 가지 중 후자의 경우는 또 다른 관점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는 것은 각 개인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차이가 있을 뿐이지 능력이 다른 것은 아니다는 시각이기 때문입니다. 잠재력의 차이일 뿐이지 하나의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모든 사람의 차이를 인정해준다면 지금과 같은 평가 체계는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교육과 평가와의 관계입니다. 교육평가라는 것은 교육에 도움을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교육의 본질추구에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평가가 교육의 본질을 훼손시킨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죠. 요즘 아직은 상대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상대평가라고 하는 것은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개인의 능력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고 구분을 위한 것을 주목적으로 하고 있죠. 구분해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다른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내가 잘 가르친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이 만점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면은 결국은 일정 수의 학생들은 불가피하게 실패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대학생이라면 학접을 받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f받아야 겠다 하는 학생은 거의 없습니다. 어떤 아주 작은 수의 학생만이 a+를 받습니다. 소위 성공의 경험을 받는 학생은 30%고 나머지는 실패의 경험을 받습니다.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에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교육의 본질이 '자아실현'입니다. 자아실현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자아개념입니다. 자아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성공의 경험과 실패의 경험입니다. 그런데 아까 그런 식의 평가를 하게 되면 70퍼센트의 학생들은 평가라는 체제에 의해 실패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실패의 경험을 하게 되는 평가는 결국 교육의 본질을 흐리는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평가는 교육의 본질을 훼손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평가는 교육에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다음에 평가라는 것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각 개인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어야 하지 각 개인을 판단하는 데에 쓰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경험입니다. 이해를 하는 데에 도움을 주려면 지금과 같이 서열을 내리는 것은 아주 불합리하고 잘못된 것입니다. 어떠한 평가책을 보더라도 우열을 매기는 것은 안된다고 나와있어요. 그런데도 실제 이루어지는 것은 우열을 구분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평가라는 것은 교육을 도와주는 도구라는 것이 명확해져야 합니다. 학생들과 관련해서는 평가가 그 학생을 도와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학교에서 예를 들면 시험을 보고 나면 본인에게 무슨 도움을 주나요? 기본 전제가 도와주는 것이 되어야 하는 데 대게 기분 나쁜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부모님도 그렇고, 본인도, 친구들도 너 몇등했니? 하고 물어보고 몇 점이니? 물어봅니다. 집에서 공부좀 그만하고 놀라는 말은 대부분 못 들어봤습니다. 왜 그럴까요? 언제나 경쟁 상태를 가지고 남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평가가 비교가 되는 것은 결국 평가의 결과를 이해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교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가 필요합니다. 경쟁상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경쟁이라는 것이 문제죠. 그러니까 평가를 이야기 할 때, 교육을 이야기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경쟁'을 어떻게 볼까 입니다.
평가의 다양성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교육은 자율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왜 자율화 과정이 되어야 하냐면은 자율화되지 않으면 창의적인 것도 없고 독립적인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창의력이나 개인의 적성과 잠재능력을 개발한다는 것은 자율성을 전제로 해야 가능합니다. 여기서 자율화라는 것은 교육기능이라고 하는 것이 외부의 간섭이나 내부의 역기능 없이 스스로 활동하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가장 크게 훼손시키는 것이 평가입니다. 예를 들면 7차 교육과정에서 제일 중요하게 하는 것이 수준별 교육과정입니다. 수준별 교육과정은 학생들의 수준에 맞게 교육의 내용, 양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교육청이 30를 정하고, 학생이 30, 선생이 나머지를 정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학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수능은 모든 교과에서 다 쳐야 하는데 그것은 한가지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안 가르칠 수가 없잖아요. 그리고 학력고사를 전국단위로 보게 되면 안 가르친 곳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모든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제'라는 말이 붙은 것은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하고 획일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국가 단위의 시험이 하나로 되는 것은 안 되는 일이죠.
두번째는 교육의 전문적인 특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전문적인 특성이라는 것은 자율의 전제 없이는 성립할 수 없고, 자율없이는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양성 없이는 전문성이 발휘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 전문성이 있다는 것은 한 개인을 잘 알고 그 사람의 병명까지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병명에 문제가 있죠. 예를 들면 미국에 있을 적에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의사가 저에게 묻는데 뭘 묻냐고 하면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질문을 합니다. medical history를 만들더라고요. 전체적인 것을 알아서 결국 그 사람의 history가 나와야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잘 안됩니다. 그냥 나타난 것이 있으면 치료를 하죠. 그다음에 전문적인 특성을 획일화시키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전국적 단위의 동일한 시험, 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아까 미국 병원 말했듯이 개인적인 특성을 알려면 개인적인 것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보기에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진단평가라는 것은 한번도 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그러한 검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검사가 이루어지려면 선다형시험이라 하더라도 선다형시험의 본질은 정답이 아니라 오답에 있습니다. 오답이 얼마나 그 수험생들의 오류 유형에 근접하였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문제를 맞았냐 틀렸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때문에 틀렸는지를 알아야 그것에 맞게 처치가 이루어집니다. 평가라는 것이 도와주려면 그렇게 해야 하죠. 예를 들어서 그냥 두자리수 덧셈을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교육하죠? 두자리수 덧셈을 100문제를 주고 풀라고 하죠. 그러면 공부하기 싫어집니다. 그때 예를 들면 제대로 진단을 하려고 하면 이 학생이 두자리수 덧셈에서 받아올리는 것을 못한다. 그런 것을 지도해주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보충수업이라는 것은 보충할 만한 것을 보충해주어야 보충수업이지 똑같은 것을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은 학교를 지겹게 만들고 평가를 싫어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반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 말은 무엇이냐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모든 그러한 처치는 개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제가 지난 12월에 쿠바를 갔었는데 거기 학교를 갔더니 제일 인상에 남은 것은 선생님이 학생에게 숙제를 내주는데 모든 학생에게 다른 숙제를 내줍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은 사람마다 해야하는 일이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소위 '맞춤형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실제로 우리가 평가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많은 경우에 교육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본질을 훼손시킨다면 평가를 없애야 합니다. 사실 시험을 없애야 한다는 말이 정확하겠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평가 결과라는 것은 뭐냐면 점수를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시험점수라는 것은 시험을 통해서 나온 결과인데 우선 점수의 의미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학문적으로는 점수의 의미를 연구하는 것을 측정이라고 합니다. 점수의 의미가 뭐냐면 우리가 재려고 하는 목표의 일부만을 잽니다. 국어시험에서 100점 만점에 90점을 받았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론적으로는 국어 시험이 교육과정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졌을 텐데 그중에서 90퍼센트가 달성됐다. 라고 보일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교육과정의 목표를 보면 굉장히 다양합니다. 그 중에서 작은 한 부분만을 본겁니다. 예를 들어서 평가에 관심을 가진 부름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교육목표를 분류하는데 지식 부분에서만 6가지 분류를 했습니다.
지식, 이해, 적용, 분석, 종합, 평가. 이렇게 단계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저희의 평가에는 지식, 이해정도 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나머지는 출제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런데 목표에는 지식만 있지 않죠. 정의적 내용도 있고 운동기능적인 내용도 있습니다. 모든 목표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큰 것 중에서 3분의 1이 해당됩니다. 그 3분에 1분에서 또 3분에 1만 달성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3분에 1마저도 가르치는 것에서 일부만을 잰 겁니다. 그럼 결국 큰 목표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이 엉터리로 되는 것이지요. 시험문제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면 4지선다 한 문항을 줄 때 얼마나 시간이 걸리느냐 하면 보통 20문항을 만든다면 아주 유능한 출제자가, 여기서 유능한 출제자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 찾기 힘듭니다. 유능하다고 하면 아까 말씀드린 7가지 경험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외국의 통계 결과에 따르면 최소한 40문항을 만드는데 50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여러분들 그런 시험 본 적이 없어요. 제가 평가원에 있었는데 그런 식으로 우리나라에서 문제를 내면 무능하다고 쫓아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요. 그게 최소의 기준인데 그 기준이나마 맞춘 시험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재낸 부분도 불분명합니다. 시험점수가. 교육에서는 창의력, 학력, 지능 이러한 것들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 학력이 뭐라고 생각해요? 제가 만약 과제로 학력이 뭐냐고 물으면 여러분들 골치 아플 겁니다. 도서관에서 학력에 관한 것을 찾으면 책들이 두껍게 나올 겁니다. 그 말이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지능이 뭐냐. 지금 여러분들이 대부분 지능검사를 하면 각자 다른 입장에서 만들어져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의하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재려고 하는 것 자체가 불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통 정신적인 과정을 교육평가에서 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잴려고 하는 내용이 불분명해지면 무슨 방법으로 잴지가 불분명해집니다. 예를 들어서 물병의 높이를 잰다고 하면 자를 가지고 잴텐데 높이를 재는 건지 부피를 재는 것인지 모르면 당연히 불분명해질 수밖에 없죠. 그러한 문제를 아예 학교에서 가지고 태어난 것이지요.
또 하나는 우리가 시험을 통해서 재는 점수라고 하는 것이 대게 직접적으로 재지를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학생의 몸무게를 재려고 하면 저울에 앉아야 되는데 대게 우리는 키를 보고서 몸무게가 얼마다 얘기를 합니다. 보통 시험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키와 몸무게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죠. 비슷한 경우가 있을 수가 있겠지만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경우가 너무 많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교육과정의 내용을 보면 초등학교를 보면 과학을 하면서 과학적인 사고력을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과학적 사고검사 받아본 적 있나요? 없죠. 대게 과학적 지식에 관한 것을 재고 과학적 지식의 성적이 높은 사람은 과학적 사고력도 높을 것이다 라고 가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정은 틀렸습니다. 그다음 또 하나는 우리가 재는 것 중 대부분은 우리가 암기를 필요로 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암기력을 필요로 하는 내용이라는 것은 시험에서 암기가 아예 필요 없는 것은 찾아보기 조금 힘들지만 암기가 덜 필요한 시험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것은 무슨 이야기냐면 여러분들의 시험성적이 초등학생하고 같이 시험을 보았을 때 높다면 여러분들이 암기를 더 잘해서 높다는 뜻입니다. 출제가 잘못된 것입니다. 암기가 필요없는 시험이 되어야 하죠. 암기할 필요가 없는 문제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제가 대학에서 10년 정도 강의를 하다 유학을 갔는데 거기 교수가 말을 하더라고요. "당신이 꽤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을 텐데 레벨 테스트를 받아보라고 하더라고요. 500문항을 가지고 시험을 보는데 시간은 아침에 와서 하고 저녁에 오라고 하더라고요. 점심을 물어보니 사먹으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은 시험을 보는 중간에 나가도 된다는 말이지요.
여러분들이 암기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도움이 되서 입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누가 암기를 하겠어요.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보는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부딪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이 교육이라고 하면 우리가 부딪힐 문제를 꼭 책상에 앉아서 해결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도서관에 갈수도 있고, 스마트폰으로도 볼 수도 있잖아요. 그런 것에서 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소위 수행평가입니다. 수행평가라는 것이 그런 의미입니다. 원래는 수행평가라는 것은 방법의 변화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평가목표의 변화입니다. 쓸데없이 암기로 공부하는 것을 배제하고 앞으로 우리가 엄청나게 많은 지적인 것이 생산되어 지는데 그것을 전부 다 해결할 수 없으니까, 우리가 평생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평생교육이라는 것이 우리가 문제에 닥쳤을 때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것인데 그 능력을 키우는 것이 수행평가다. 목표의 변화입니다. 방법의 변화가 아니라. 이론적으로 multiple choice는 수행평가가 아니라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모든 것이 책상에서 논술형으로 쓰면 수행평이라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평가의 목표를 바꾼 것이 수행평가입니다. 평생교육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주도적 학습을 높일 수 있고 창의력을 높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평가방식이 수행평가입니다. 원래 그렇게 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제 결과를 드려야겠네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평가를 생각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여러가지 평가의 테크닉이나 문제 내는 방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평가를 어떠한 입장에서 보아야 하는 것인가 입니다. 또 하나는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인데 평가를 이야기하면서 공정성, 객관성 이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공정성이나 객관성이라는 것은 부수적으로 따라와야 하는 것이지 그것을 위해서 평가를 하게 되면 평가는 헛평가를 하게 됩니다. 보통 우리가 그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사람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게 되면 공정성은 어떻게 보장하느냐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공정성을 가지려면 아까 굉장히 무의미한 점수만을 위한 공정성을 가져야만 하는데 점수는 그렇게 의미가 없고 그러면 뭘로 합니까? 결국 공정성이라고 하는 것은 나중에 생각하는 것이지 공정성 하나만을 보면 언제나 점수만 가지고 하게 됩니다.
점수만 가지고 하니까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대학에 들어올 때 수능점수가 320점이면 대학을 붙고 319점이면 대학을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는 그러한 사고가 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320점과 319점은 전혀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한테 물어봐도 차이가 없습니다. 1점의 차이가 아니더라도 325점과 315점도 차이가 없습니다. 순전히 우연적인 오차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의미 있는 차이라고 잘못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런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야지요. 만약 그런 식으로 쓰인다면 없어져야 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평가에 대한 생각을 할 때 지나치게 공정성 같은 것을 고려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다른 사람과 만나서 해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뭐냐면 학교의 경우에도 예를 들어 창의력에 차이가 나야 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창의력은 어떻게 재냐 제가 묻고 싶습니다. 인성 어떻게 재나요? 사실 여러분들이 생활하면서 다 압니다. 그런데 못하는 이유가 머냐면 공정성, 객관성 때문입니다. 30명을 다 줄 세우려고 한다면 당연히 못하죠. 그런데 왜 모든 사람을 줄 세워야 하느냐. 그것은 교육평가에서 경쟁을 중요시하고 경쟁을 우리 자유민주주의에서 완전히 없앨 수는 없으니까. 경쟁을 완화시키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는 한 평가는 없어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마치겠습니다.
질문) 안녕하세요. 평가에 대해 이야기해주시면서 평가는 각 개인을 비교하기 보다는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근데 그 전제는 경쟁상태가 아니여야 하는 점인데 사실 우리나라 교육에서 경쟁을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려운 현실입니다. 그러면 그 전제에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요?
답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경쟁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경쟁을 시켜야 합니다. 지금은 수능이 현재 가장 중요한 이유가 멀까요? 대학이 그것을 왜 택할까요? 간단합니다. 전국단위의 서열을 나타내는 시험이 그거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학생을 뽑을 때 여러 유형으로 뽑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까부터 계속 말하지만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은 다른데 그것을 하나로 뽑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 종류로 뽑아야 하는 것입니다. 학력으로 뽑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러 다양한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공정성에 관한 것이 나올텐데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아까 말했던 것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여러 유형으로 나누어서 경쟁을 시켜야 하고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각 개인의 경쟁이 아니라 프로그램 간의 경쟁을 시켜야 합니다. 예를 들어 경쟁을 시킬 때 부분 부분 나누어서 시험을 보면 한줄로 쫙 나열되지는 않죠. 여러 줄로 세워지는 거죠.
완화되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유형으로 뽑는 방법을 생각해야 하고 그것은 국가가 아닌 학교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뽑는 것에 대한 내용을 고등학교에서 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교에서 정하는 것입니다. 대학에서 자신에게 맞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그것에서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대학이 특성화되어야 하는 점입니다. 전체적인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조금씩 해나가는 것이 앞으로의 방향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