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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나다움을 밝히기 위한 길, 그길을 꿋꿋이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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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7월 15일] 언어의 모호성

 

모임일 ㅣ 2017년 7월 15일 오후 6시 30분

 

오늘의 글

시작이 있으면 그 앞에 [아직 시작되지 않음]이 있고,

또 그 앞에 [아직 시작되지 않음의 이전]이 있다.

[있다]가 있고 [없다]가 있으면,

그 앞에 [있다 없다의 이전]이 있고,

또 그 앞에 [있다 없다 이전의 이전]이 있다.

사물의 기원을 쫓으면 끝이 없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갑자기 [있다 없다]의 대립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그 [있다 없다]의 대립은 결국 상대적이므로

어느 쪽이 [있다]이고

어느 쪽이 [없다]인지 알 수 없다.

지금 나는 여기서 의견을 말했지만

내가 한 말이 과연 정말 말한 셈이 되는 걸까,

말을 안 한 셈이 되는 걸까?

그것도 모르겠다.

-장자 제물론

성찰&다짐

익명 #1

내 경험은 아니고 간단한 것인데, '혼돈'이라는 소설을 쓴 최명희 작가님을 만났는데, 자기가 원하는 느낌을 담기 위해 3일간 고민을 했다고 한다. 즉 인간관계에 있어서 언어는 소통의 매개체인데, 말하는 사람마다, 듣는 사람마다 다르게 말하고 해석한다. 그만큼 신중하게 언어를 사용해야한다.

강종원

삶 속에서 언어가 달라 오해가 생긴것을 깨달은 것이 아버지와의 관계에서이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아버지라 '밥 먹었냐' '공부는 잘 하냐'와 같이 이야기하는데, 이것이 그분의 언어시다. 사실 공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아버지가 있었던 문화와 이야기를 보면 사실 그 언어가 그분 입장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언어이다. 언어는 그럴지라도 언어가 한계를 인식하니 언어를 뛰어넘은 진심을 볼 수 있었다.

배수연

친구가 약속을 잡다가 '지상'을 가자고 했다. 나는 지하와 지상을 생각하며 지상이 뭐냐고 물어봤는데 '지하상가'의 약자라고 했다. 친구들끼리 그렇게 말하다보니 나한테도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재밌다. 오늘 언어에 대해 이야기하며 발화자와 청자의 배경에 따라 의도와 이해가 다를 수 있음을 이야기했는데, 교육에 접목했을 때 수업을 하기 전에 개념정리를 교사와 학생이 함께 하는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박희택

이 글을 읽으며 노자의 '도가도 비상도'가 생겼다. 도가 있어도 말을 하면 더이상 도가 아니다라는 말이 기었났다. 내 아르바이트중 체험학습 가이드 역할을 한 적이 있었다. 교육을 받는데 아이들을 존중하고 맡기라고 배웠지만, 막상 하려고 하니 너무 어려웠다. 50분 안에 경복궁을 정독해야하는데, 그럼 거의 달려야한다. 온갖 스트레스를 받게 됐었다. 아이들을 존중하고 아껴야하지만, 알면서도 행하기 어려웠다. 말은 알지만 행동을 뒤따라오지 못하는. 책도 마찬가지다. 나를 사랑하라고, 남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지만 아는 것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은 다르다.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안철우

언어의 한계를 최근에 느낀 것이, 대숲에서다. '시선강간'이라는 용어 때문에 많이 싸웠는데, 세계는 연속적인 특성이 많다. 색깔도 그렇고, 폭력도 폭행, 희롱 등 연속적이다. 그런데 언어는 불연속적이기에 언어로 표현하기가 애매하다. 언어라는 것이 제한되어 있기에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닐까. 최근에도 대선에서도 '강성귀족노조'와 같은 언어선택 때문에 싸움이 났다. 연속적인 세계를 분절하려고 하니 좀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장준영

나는 어머니 이야기를 하겠다. 언어는 언어만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 같다. 엄마랑 대화를 하려고 해도 감정이 앞선다. 그래서 말을 줄이게 된다. 어떨 때는 언어로 하는 것보다 선물, 행동과 같은 것을 통해 소통할 수 있다. 언어로 '사랑해'라고 표현하지 않아도 말이다.

양동규

최근에 교육판이라는 곳에서 글을 쓰면서 느끼는게, 똑같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도 '옹호'와 같은 단어를 보면 언어라는게 일종의 필터가 될 수 있음을 느꼈다. 언어를 조심히 사용해야겠다는 반성을 하게 됐다.

백진우

오늘 위기아띠때 토의를 했는데, 그때 교육과 사회화의 정의를 가지고 막 싸웠다. 그런데 사실 교육에 대해 정의가 다르다 보니 그런 것이지, 의도를 잘 살피면 오히려 서로 조화롭고 옳고 멋진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설렜다. 미래를 생각해보면 서로 언어의 주파수를 맞추면 진정한 협력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또 학자들이 얻은 깨달음들도 언어의 주파수만 잘 맞추면 또 엄청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위기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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